석가모니 탄생설화에 나오는 흰 코끼리는 성스러운 동물이다. 지금도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 불교국가에서는 정의와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게 서양에 건너와서는, 실제 효용가치보다 비용부담이 훨씬 큰 사치한 물건을 뜻하게 됐다.
19세기 미국의 서커스 쇼 사업가가 희귀한 인도산 흰 코끼리를 보지도 않고 많은 돈을 들여 수입했다가 낭패를 본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한 코끼리는 온 몸에 얼룩 반점이 있어 관객을 실망시켰고, 우리에 갇힌 채 사료만 축내다 폐사해 큰 손해를 안긴 때문이다.
■ 원래 인간의 순수한 소망이 담긴 흰 코끼리, White Elephant는 이처럼 분별없는 욕심이 낳은 대형 실패작을 일컫는 데 쓰인다. 20세기 초 항공기 시대를 내다보지 못한 초대형 비행선 제작을 그렇게 빗댔다.
2차 대전 때는 일본이 자랑한 야마토(大和)급 거대 전함이 항공모함 중심으로 바뀐 해전에서 맥없이 격침돼 흰 코끼리에 비유됐다.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사상최대 돔 구조물인 런던 밀레니엄 돔, 세계 최고를 꿈꾼 평양 류경호텔도 그런 예다.
그러나 압권은 단연 핵무기다. 단 두 차례 사용한 뒤 60년이 지나도록 그저 쌓아두고만 있으니 이처럼 쓸모 없이 값비싼 물건은 다시 없다.
■ 게다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핵무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존재다. 14일 영국 하원에서 새 전략 핵무기체계 개발안에 집권 노동당의원 다수를 포함해 161명이 반대한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물론 개발안은 보수당을 중심으로 의원 409명의 지지를 받아 승인됐다. 트라이던트 핵 미사일 16기를 각기 탑재한 핵 잠수함 4척으로 이뤄진 영국의 전략핵무기는 운용시한이 2019년까지다. 그 뒤 2050년까지 운용할 신형 핵잠수함과 미사일 개발에 17년간 500억 달러(약 48조원)를 들일 계획이다.
■ 블레어 총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한 안보 보험"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의회와 언론의 반대론은 안보 위협이 없는 마당에 핵을 폐기하기는커녕 현대화하는 것은 국가 위신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또 실제 사용할 가능성이 없는 핵 억지력 자체가 허상에 불과하며, 설령 필요하더라도 미국의 핵우산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핵 무장은 안보 능력을 과신, 무모한 전략을 추구할 위험만 높인다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 일각의 핵 무장론이 새겨들을 만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