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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칼럼] 세상을 읽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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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칼럼] 세상을 읽는 힘

입력
2007.03.1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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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문학평론가 김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 황지우 시인은 <이 세상을 다 읽고 가신 이> 라는 추모의 글을 썼다. 대단한 말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런 말까지 들을 수 있었을까. 김현은 그 사람만큼 한국문학을 읽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책을 꼼꼼하게 읽었다고 한다.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면 대뇌에 도서관이 한 채 들어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다 읽고 간 것은 문학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든 만화든 유행가든 다른 무슨 예술이든 사회현상이든 자기 시대는 물론 해외, 그리고 고전의 문법과 문맥을 두루 알았다는 뜻이다.

어느 때든 그 시대의 독보적 기억장치라 할 만한 인물이 늘 있지만, 김현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사망 5개월 후에 나온 평론집, 황지우의 글이 실려 있는 그 책의 제목마저 <전체에 대한 통찰> 이라고 돼 있다.

● 감식안과 지적 성실성의 결합

세상을 읽는 힘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감식안만이 아니라 지적 성실성,

독서욕과 체력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해독의 능력이나 수준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읽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독서력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읽는 힘을 얻을 수 없다. 김현의 경우 읽는다는 것이 성욕보다 더한, 참을 수 없는 욕망 같아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읽는 세상이 아니라 보는 세상이라고 흔히 말한다. 인쇄매체는 쇠하고 영상만이 승한 세상이다. 하지만 보는 것은 읽기를 위한 기초행동이며, 모든 보는 행위는 읽기를 통해 그 의미가 발견되고 완성된다. 그림을 읽는다거나 경제를 읽는다는 말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시대의 의미와 기호를 남들보다 먼저 알아내는 사람은 쉽게 말해 선각자다. 공상과학소설에 나타나는 절묘한 상상력, 다양한 예측을 거의 다 적중시키는 미래학자의 세상 읽기는 얼마나 놀라운가. 갖가지 경제ㆍ과학부문의 합성어는 세상 읽기의 필요에 의해 양산되는 발명품이다.

세상을 읽는 힘은 모든 계층 모든 직업에 필요하다. 대기업의 소유주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시대의 의미를 읽지 못한다면 그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제대로 읽는다면 편하게 살 수 없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관성을 떨치고 끊임없이 혁신하고 진보하는 노력을 저절로 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행정부의 한 핵심인사가 2년쯤 전에 "2002 대선은 인터넷선거였지만 2007 대선은 모바일선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UCC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이었다.

그의 말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놀라운 예측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을 읽는 힘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지도자다. 대통령선거의 해에는 정치지도자의 리더십과 세상 읽는 힘을 그래서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론조사 1, 2위를 계속해서 달리는 사람들만으로 한정해 생각해 보면 이들의 세상 읽기에는 불안한 점이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제시하는 한반도 대운하로 대표되는 건설경제는 권위주의시대 토목시대로의 회귀라는 비판을 불렀고, "지금은 그런 육체경제시대가 아니다"라는 반론에 부딪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최근 한 사찰에 갔을 때 "제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맑게 하는 향처럼 나라와 국민만 생각하며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교하려 하는 사람은 오히려 위험하다. 국민은 순교자를 바라지 않는 세상이다.

● 대선주자들의 미흡한 국민 읽기

이명박 전 시장의 계획에 대해 청와대가 "지금은 토목의 시대가 아닌데 그런 약속을 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비판이야말로 국민을 무시하는 말이다. 청와대는 여전히 국민을 잘 읽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그 동안의 대통령선거 경험을 바탕으로 옳은 판단을 하기 위해 난장에 나와 있는 정치지도자들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이인제 효과, 노무현 효과 이런 말들이 요즘 많이 쓰이는데, 그런 효과들도 국민의 세상 읽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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