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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희망이 기적보다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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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희망이 기적보다 좋지 아니한가

입력
2007.03.1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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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없었다. 달동네 주민들은 모두 쫓겨났다. 정말 ‘기적’처럼 누군가 선행을 베풀어 주인공인 명란(하지원)과 일동이 이순이 남매를 그곳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게 할 수도 있다. 영화니까. 아니면 똘마니에 불과한 필제(임창정)가 괴력을 발휘해 그들을 그곳에 남게 해줄 수도 있었다.

윤제균 감독의 <1번가의 기적>은 그러나 끝내 그런 우리의 소망을 외면했다. 철거청부를 맡은 조폭들의 구둣발에 얼굴이 짓밟히고, 무자비한 몽둥이질에 온몸이 멍이든 채 ‘산 1번지’의 사람들은 철거보상비 몇 푼 손에 쥐고 사라졌다. 보다 못해 두목에게 대든 필제 역시 마찬가지다.

결코 영웅이 되지 못하고 죽도록 얻어터진다. 그리고 한다는 짓이 우는 일동이 이순이에게 “두겁아, 두겁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라고 소리치라고 한다. 중병에 걸린 명란의 아버지(정두홍)도 그냥 죽는다. 명란이 록키처럼 막판 뒤집기로 멋지게 복싱 동양챔피언이라도 되는 것이라도 보고 죽었으면…

특별히 좋아진 것도, 달라진 것도 없다. 엉뚱한 오해로 곤경에 빠진 가장인 심창수(천호진)을 위해 오랜만에 가족이 몸 사리지 않고 한바탕 격전을 치렀지만 그 뿐이다. 끌어안고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다” “내 잘못이다” “우리 이제는 이렇게 살지 말자” 며 울고불고 하지 않는다.

성생활에 불만이 가득한 아내 희경(문희경)은 계속 욕설을 해대고, 용태(유아인)는 자신이 친아들이 아님을 알고도 절망하지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제가 친아들이면 더 좋았을까요”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그건 모르겠는데. 친아들이 있어 본적이 없어서”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심창수.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가> 역시 ‘좋은 일’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난리를 치고도 심창수 가족은 오늘도 누구에게도 무관심한 채 거실에 앉아 말없이 자기 먹고 싶은 반찬만 먹는다.

아! 우리가 바라는 영화 속의 마지막 가족모습은 이게 아닌데. 영화가 무엇인가. 판타지가 아닌가. 상상과 꿈, 환각과 비현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현실이 잃어버린 것들을 영화는 멋지게 되살려 놓을 수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도 윤제균 감독은 <1번가의 기적>에는 분명 기적이 있다고 했다.

그 기적이란 “일동이 이순이가 엄마를 만나 그렇게 먹고싶던 토마토를 마음껏 먹고, 명란이 나중에 동양챔피언이 되고, 사랑을 몰랐던 필제가 명란을 사랑하게 되고” 이다. 정윤철 감독 역시 <좋지 아니한가> 에는 판타지가 있다고 했다. 지구와 달과 원시인이 인간에 대한 은유로 등장하고, 심창수도 마치 보름달을 본 늑대처럼 달빛을 받고 죽었던 남성이 되살아 나지 않았는가.

거기까지다. 두 영화는 우리 삶에서 그 정도의 기적만이 가능하며, 설령 그마저 현실에서 불가능하더라도 영화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짓말, 사기”라며 판타지를 지독히 싫어하는 리얼리스트 이창동 감독도 <박하사탕> <오아시스> 에서 이 정도의 당의정은 허용했다.

어쩌면 한국영화의 자리를 여기인지도 모른다. 웃던, 울던, 주먹질을 하던, 괴물을 만들어 내던, 역사 속으로 들어가던, 우리의 삶에 뿌리를 박고 서야 하는 영화. 그래서 할리우드의 ‘기적만능주의’보다 울림이 크고, <1번가의 기적>의 대사처럼 “그 부족함이 있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대현 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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