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4~6년 후 큰 혼란을 맞을 수 있다고 섬뜩한 경고를 한 이건희 삼성 회장은 내부 문제에 대해서도 "(생활가전 사업은) 한국에서 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솔직한 속내를 보였다. "내수는 모르겠지만 수출은 아니다.
개도국에 넘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방향까지 제시했다. 생활가전은 한 해 몇 조씩 순익을 내는 반도체, 휴대폰, LCD 분야와 달리 삼성전자 주력 사업군 가운데 만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미운 오리' 신세. 따라서 이 회장 발언이 어떤 사업전략의 변화로 이어질지 시선이 쏠리고 있다.
▦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1등주의를 추구하는 삼성전자가 왜 유독 생활가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일까.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같은 날 경쟁자인 LG전자의 이영하 생활가전부문 사장이 내놓았다. 한마디로 핵심역량의 차이라는 것이다.
LG는 가전에 기업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지만, 삼성은 반도체와 휴대폰이 주력이어서 가전에 전사적으로 자원을 투자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가전 분야에서는 삼성이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그의 발언은 두 기업의 숙명적 라이벌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 국내의 전자산업 시대를 연 주역은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다. 1959년 국내 처음 라디오를 개발한 금성사는 이어 냉장고, 흑백TV, 에어컨, 세탁기 등 가전의 국산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1968년 삼성이 뒤늦게 전자 사업에 뛰어들면서 모든 제품에서 한치 양보도 없는 숨막히는 '별들의 전쟁'이 시작됐다.
한 회사가 신제품을 내놓으면, 상대는 밤을 새워서라도 다음 날 비슷한 제품을 내놓는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다. 한쪽이 '기술의 상징'이라고 광고를 하면, 다른 쪽은 '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국내 최초'라고 하면 '세계 최초'로 맞불을 놓곤 했다.
▦ 86년 매출면에서 삼성이 앞서자 양측 홍보 관계자들은 언론 기사에 표시되는 기업 순서를 놓고도 피 말리는 신경전을 펴기도 했다. 때때로 고객을 속이기도 하고, 낯 뜨거운 진흙탕 싸움이나 법정 소송으로 번지기도 했지만, 한 두 기업의 사운을 건 경쟁은 국내 전자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삼성이 반도체, 휴대폰으로 특화를 하고, LG는 가전에 집중함으로써 전선이 다소 달라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두 기업은 한국 IT기술 발전을 이끄는 양대 축이다. 기업은 역시 경쟁을 먹고 자란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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