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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 오사카(上)-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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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 오사카(上)-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첫 만남

입력
2007.03.1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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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가본 외국 도시가 일본 오사카다. 1990년 8월, 세는 나이로 서른 두 살 때였다. 한 신문사 문화부에서 일하던 나는 그 해 8월3일부터 5일까지 그 도시에서 열린 제3차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 땅을 벗어났다. 내 또래 사람들과 견주어도 첫 해외 나들이가 늦은 편이었다.

학술토론회는 사흘 간 열렸지만, 나는 8월1일부터 11일까지 열 하루 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심포지엄에 참가할 한국학 연구자들이 이미 7월 말부터 일본에 속속 입국하고 있어 그들을 미리 취재해야 했고,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며칠이라도 일본 구경을 하고 싶어 데스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귀국을 늦추었다.

(그 때 내 데스크는 지금 보스턴 총영사로 나가 있는 지영선 씨다. 지 선배의 너그러움에 뒤늦게나마 고마움을 표한다. 일본에 있는 동안 커다란 국제 뉴스 하나가 서남아시아에서 터진 게 또렷이 기억난다.

내가 오사카에 간 이튿날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했고, 교토에 머물던 8월8일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두 나라의 합병을 선언했다. 지금처럼 그 때도 나는 일본어를 거의 몰랐지만,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그 소식을 어찌나 요란스럽게 전해줬던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오사카는 서른 해 남짓 살아온 내 나라와는 다른 외국 땅이었지만, 그 도시에서 나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크게 받지 않았다.

조선학 학술토론회가 열렸던 오사카 한복판 우에혼마치 지역의 오사카국제교류센터와 오사카정보컴퓨터전문학원 건물이 일본어의 바다에 떠있던 한국어의 섬이었던 덕도 있었을 테고, 그 도시 자체가 상당수 재일 한국인들의 세거지지(世居之地)인 덕도 있었을 테다. 그러니까 내가 오사카에서 본 것은 일본이 아니라 휴전선 너머의 한국(조선)과 현해탄 너머의 한국(조선)이었다.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는 1986년 중국 베이징에서 베이징대학 조선문제연구소가 주최해 처음 열렸다. 그 두 해 뒤인 88년 역시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대회는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연구소와 베이징대학 조선문제연구소가 함께 주최했고, 이 두 연구소는 90년 오사카의 제3차 대회도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었다.

이 3차 대회에 온 북한 학자들은 11명에 지나지 않았던 데 비해 그 스무 배가 넘는 남한 학자들이 발제자나 토론자 또는 일반 참관자로 자리를 메웠지만, 당초 노태우 정부는 우리 학자들이 이 심포지엄에 참가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었다.

북한 쪽 참가자들이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됐던 데다가, 주최측의 ‘색깔’이 미덥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안기부(지금의 국정원)는 은밀히, 학술진흥재단은 공문을 통해서 공공연히 남쪽 학자들의 참가를 만류했고, 실제로 초청장을 받고도 뒤탈을 염려해서 오사카 행을 포기한 학자도 적지 않았다.

학술진흥재단의 공문은 오사카 대회의 공동실행위원장을 맡은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오청달 교수의 가족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비록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긴 했으나, 그 땐 아직 소련이 건재할 때였고 독일도 통일되기 전이었으며 중국과 수교도 되기 전이었다. 그러니 남쪽 정부의 까탈을 지금의 시각으로만 볼 일은 아니겠다. 그래도 그 대회를 일본 외무성과 보수적 매체 요미우리신문이 후원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 정부의 처신이 ‘넘치는’ 짓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오사카에 도착한 8월1일, 나는 기자 생활 중 잊지 못할 일을 겪었다.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예정돼 있던 여러 국적의 한국학 연구자 1,000여 명 가운데 기자로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이는 분국설(分國說ㆍ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 한반도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 삼한과 삼국의 식민지랄 수 있는 분국을 여럿 설치했고, 일본 역사학자들이 들먹이는 소위 임나일본부란 일본 열도 안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이라는 견해)로써 야마토 왜(倭)의 고대 한반도 남부 경영설(소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해 명성을 얻은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1915~1996)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김석형 선생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 욕심이 지나쳐 나는 ‘오버’했고, 그 ‘오버’의 대가를 치렀다.

공항에서 오사카국제교류센터로 직행해 대회 조직위원회에 취재 기자 등록을 하며 북한 학자들이 그 날 오사카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조직위 사람 하나를 구워삶아 북한 학자들이 묵고 있는 호텔이 어디인지도 알아냈다.

구워삶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과 수교가 되지 않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미리 알려주는 걸 조직위에서 꺼렸기 때문이다. 북한 학자들의 숙소는 내?배정된 호텔과는 거리가 꽤 되는 곳이었다.

나는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북쪽 사람들이 묵고 있다는 호텔로 갔다. 김석형 선생 일행은 아마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간 듯 호텔에 없었다. 나는 로비 옆의 카페에서 출입문을 주시하며 죽쳤다. 기자들 은어로 소위 ‘뻗치기’를 시작한 것이다.

거기까지가 한계였(어야 했)는데 나는 그 한계를 넘고 말았다. 조바심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이다. 다음날도 아닌 바로 그 날 김석형 선생을 인터뷰하고야 말겠다는 욕심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접수계 직원이 교대하기를 기다려 새 직원에게 나를 김석형씨 일행이라고 거짓 소개한 뒤, 김석형 선생 방의 열쇠를 얻어 그 방엘 들어갔다.

방 주인을 안에서 맞을 생각이었다. 내 신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열쇠를 건네준 호텔 직원도 무책임했고, ‘특종’에 눈이 멀어 남의 사적 공간에 ‘범죄적 수법’으로 침입한 나도 부도덕함을 넘어 아둔했다. 나는 김석형 선생 방에서, 내게 곧 닥칠 불행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담배까지 피워대며 주인을 기다렸다. 제임스 본드라도 된 듯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제임스 본드는 ‘선량한 스파이’(라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가 아니라 잔혹한 킬러이고 테러리스트다. 그리고 내가 제임스 본드 흉내를 냈을 때, 킬러 대접, 테러리스트 대접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는 걸 예상하는 덴 약간의 이성적 판단만으로도 충분했다. 특종에 미친 그 때의 내겐 그 약간의 이성적 판단이 없었다.

남의 방에서 한 시간 남짓을 기다렸을 때, 웅성거림 소리와 함께 방 주인이 들어왔다. 당연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미 자기 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접수계에서 들었을 테니.

방 주인은 자기 허락도 없이 제 방에 들어와 자신을 기다리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보고 공포와 경악과 불쾌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총련계의 조선신보 기자를 포함한 북쪽 사람들 모두가 그 방으로 몰려들었고, 이내 호텔 직원들도 합류했다.

태어나서 그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북쪽 사람들을 나는 ‘무더기로’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둘러싸였고, 마침내 ‘체포’되었다. 처음엔 그 어떤 변명도 사과도 소용없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사실 변명과 사과가 통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북쪽 사람들은 대뜸 나를 우익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럴 밖에. 그 때나 지금이나 일본 우익은 ‘북조선’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제시한 기자 신분증과 학술토론회 참가 아이디카드도 그들은 신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요하고 거칠게 나를 취조했다. 취조의 일반적 언어 형식인 반말로. 북쪽 학자들 모두가 말 그대로의 ‘학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취조 전문가’도 끼여 있었을지 모른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들과 내가 한 언어를 쓴다는 점이었다. 처음 가본 외국 도시의 호텔 방에 억류돼 있던 내게 그들이 불가해한 외국어를 썼다면, 나는 완전히 절망했을 것이다.

내게 익숙한 유일한 언어인 ‘조선어’로 나는 역사학자 김석형에 대한 내 존경심을 드러냈고, 그 존경심이 한 원인이 되어 저지른 무례에 대해 곡진히 사과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나를 거칠게 다루면서도 경찰을 부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성국의 경찰을 믿지 못했든지, 나를 (조금은) 믿었든지 둘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들은 서울의 내 직장으로 전화해 나에 대해 ‘취재’를 했고, 야근 중이었던 내 동료 하나로부터 내 인상착의를 세세히 들은 뒤 오해를 풀었다. 그리고 자정 가까운 시간이 돼 나를 풀어주었다. 그 때까지도, 김석형 선생은 못마땅하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만났다. 내 사려 없음 때문에 그 첫 만남은 양쪽 다에게 불쾌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저녁 대회 조직위가 주최한 리셉션 자리에서, 나는 북한 사람들이 가장 친근히 대하는 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한 사람들이나 외국인들과 달리 그들은 자기들끼리 한데 어울려 있었고, 이방인들과는 말을 거의 섞지 않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여 있는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학술대회가 시작된 8월3일, 76세의 대구 출신 역사학자 김석형은 1946년 월북한 지 44년 만에 처음으로 남쪽 가족을 만났다.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이뤄진 이 만남의 시간은 그러나 합쳐봐야 30분도 채 되지 못했다.

그런 사적 만남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토론장 안의 공적 만남에서도, 북쪽은 소극적이었고 남쪽은 적극적이었다. 아니, 북쪽은 소극적이다 못해 신경질적이었고, 남쪽은 적극적이다 못해 무례하고 경망스러웠다. 김석형 선생의 방에 무단침입한 내 행위는 남쪽이 북쪽에 드러낸 그 무례와 경망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대회가 열리던 오사카국제교류센터 한 모퉁이에는 북한 책을 파는 간이서점이 들어서 있었다. 김일성 김정일 선집류와 그 즈음 남한에서도 ‘불법으로’ 복제 출판되던 <조선통사> 류의 조선학 책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을 오래 들춰볼 수 없었다. 그 활자들의 허장성세와 조잡함이, 전라도 말로 하자면, 짠했기 때문이다. 내가 외국에서 처음 만난 또 하나의 조국은 그렇게 투박하고 고집스러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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