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수나라 장수 우중문이 뜬금없이 고구려 후예들의 언론을 탔다. 이 소식을 그가 지하에서 들었다면 실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난 9일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면서 을지문덕 장군의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주는 시'를 인용했다.
"신통스러운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다했네/ 싸움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 하시지!" '너 잘난 줄 아니까 이제 주제 파악 좀 하고 찌그러져!'는 내용이다.
■ 대변인은 이 시를 읽고 나서 재미난 패러디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노 대통령님, 이제 그만 하시지요"라고 했단다. 논평 제목도 '수장(首將) 노무현에게 주는 시'로 달았다.
을지문덕의 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 평양성 앞까지 들이닥친 적장에게 보낸 것이다. 원수에게 보낸 시를 패러디랍시고 제 나라 대통령한테 보냈으니 우중문이 들었다면 그 똘망똘망하던 고구려 후예들이 그리도 정신이 없어졌는가 싶었겠다.
그런데 사흘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팀이 이 시 영역본을 미국 협상단에게 보냈다. 딴에는 '너희들, 이제 더는 요구하지 마'하는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보자는 발상인 것 같다.
■ 그런데 정작 을지문덕 장군의 시는 유머러스한 것이 아니라 섬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중문이 그 시를 받아 들었을 때는 이미 고구려군의 포위망에 갇혀 "30만 대군 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가 2,700명에 불과"(삼국사기)하게 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신출귀몰한 전술전략으로 적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에서 한번 여유를 부려 본 것이다. 을지문덕 못지않게 글 잘하고 책도 많이 쓴 우중문으로서는 "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 하시지!"라는 마지막 행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 "족함을 알면 욕을 보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 구절을 살짝 비틀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쓰렸으랴. 수십 년 후 당나라에서 <수서(隋書)> 를 편찬하면서 '우중문전(傳)'에 이 시를 올린 것은 그 '쪽팔림'을 드러냄으로써 지나간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이겠다. 수서(隋書)>
그런데 우리 협상단이 지금 을지문덕 같은 입장인가? 터무니없는 오버다. 그러니 조롱이 하소연으로 전락한다. 하기야 '올해의 사자성어'라며 밀운불우(密雲不雨)니 상화하택(上火下澤)이니 하며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알 필요 없는 희한한 표현을 발굴해 쓰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면 할 말은 없고….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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