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에서 사업가로 오뚝이 인생' 신충식 사장
*"세계인이 모두 칫솔 살균기 쓸 때까지"
*방송 나간뒤 대박… 日 40% 점유·유럽 홈쇼핑 진출
신충식(48) 에센시아 사장은 항상 ‘에센시아’(스페인어로 기본)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사업가에서 졸지에 노숙자로 전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볼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이런 신념의 결과다. 그의 삶은 후배들이 “형처럼 재수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농을 던질 정도로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돼 있다. ‘억세게 운이 없었던’ 신충식 사장의 오뚝이 인생을 소개한다.
● 대박의 꿈, 쪽박의 현실
학창시절 그는 결석 날이 더 많았다. 아무리 칫솔질을 해도 치통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오공고 졸업 후 회사에 근무하던 1980년대 후반 그는 칫솔모에 바퀴벌레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칫솔 살균기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각종 문헌을 찾아보면서 치솔모에 기생하는 균 때문에 발병하는 질병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시절의 의문이 눈 녹듯 풀리면서 사업이 아른거렸다.
치과 의사에게 칫솔 살균기 개발 아이디어를 타진했더니 좋은 아이디어라며 맞장구를 쳤다. 칫솔 살균기를 개발하기만 하면 세계 최초였다.
2,000만원의 전세자금을 빼내 쏟아 붓는 등 1년 여를 개발에 매달렸지만 실패를 거듭하자 함께했던 동료들이 6개월 만에 모두 떠났다. 6평짜리 사무실에 남은 건 신 사장과 부인뿐이었다.
89년 산고 끝에 첫 제품이 출시됐지만 시장 반응은 냉소 그 자체였다. 치과 의사들마저 “칫솔을 자주 교체하고 말려주면 되지 굳이 살균기까지 쓸 필요가 있느냐”며 등을 돌렸다.
대박의 꿈이 쪽박의 현실로 다가왔다. 생계를 위해 하는 수 없이 건어물과 과일장사로 나섰다. 하지만 장사를 하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칫솔살균기를 손님들에게 소개할 정도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93년 말 1억8,000만원의 빚 때문에 길거리로 나앉았다. 숙식은 한강변 봉고차에서 해결했다. 부부가 3살 난 첫째와 돌도 지나지 않은 둘째를 껴안고 새우잠을 잤다. 끼니는 한강물로 끓인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급기야 둘째가 급성폐렴에 걸렸다. 병원비를 댈 수 없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아이를 병원에 눕혀 놓고 뛰쳐나왔다. 아이 옆에 ‘1년간만 아이를 맡아주십시오. 꼭 찾으러 오겠습니다’라는 절규 어린 메모지를 남겨 놓았다. 그는 “살아보겠다고 살려달라고 절규 했지만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며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도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 생존 전략은 ‘오뚝이’
기회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찾아왔다. 96년 중소기업청이 설립되면서 중기 제품소개에 나섰고, 운이 좋게도 신씨의 치솔살균기가 방송에 소개된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방송 다음날 제품을 사기 위한 행렬이 수백미터나 이어졌다. 제품 개발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을 도와주던 선배가 회사 공금을 가지고 도주했다. 배신감으로 중풍까지 와 8개월을 병상에서 지냈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우선 일반 국민이 칫솔 살균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판단에 칫솔 살균기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와 함께 각종 세계 발명품 대회에 제품을 출품해 우수성을 알렸다. 2000년 ‘발명상품 산업포장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물론 미국 스위스 독일 홍콩 일본 발명품 대회에서 대상을 싹쓸이했다. 2001년에는 홈쇼핑 최고상품을 독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승승장구 하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격이 3분의 1에 불과한 값싼 중국의 모방 제품이 들어오면서 바이어들이 약속했던 주문을 미뤘다. 예방차원에서 특허를 100여개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막무가내식 불법복제에는 별 방법이 없었다. 바이어들은 비슷한 제품을 비싸게 판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에센시아를 외면했다.
연달아 해외영업팀장이 살균기술을 중국의 경쟁업체에 빼돌리려다 적발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팀장은 에센시아 부도 소문을 퍼뜨리면서 은근 슬쩍 해외 바이어를 중국업체와 거래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회사는 다시 곤두박질쳤다.
● 비상의 날개를 달다
2005년 배수의 진을 쳤다. 중국 복제품이 활개치지 않을 정도의 고부가가치 살균기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바이어들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기술수출 방식을 제안하고, 신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시장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초기 실패 경험을 교훈 삼아 바이어들의 의견을 수렴해 디자인을 바꿨다. 그렇게 해서 8개 신제품이 추가로 출시됐다.
10% 정도에 불과했지만 중국 제품에 실망한 바이어 중 일부가 돌아왔다. ‘제품은 비쌀수록 제값을 한다’고 설득하며 새로운 판매망을 확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2006년부터 미국 캐나다 러시아 베트남 태국 등 독점 해외 판매망을 구축했다. 까다롭기도 소문난 유럽시장의 빗장을 풀었다. 독일 터키 프랑스 영국 체코 러시아 네덜란드 스웨덴 홈쇼핑에 진출했고, 일본에서도 3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올해 5월에는 국내보다 먼저 일본 JAL항공에 기내 면세품으로 공급할 계획이다. 일본에서 에센시아의 점유율은 40%로 독보적이다.
미국 유타주에서는 현지공장을 설립하자는 제안을 해왔고, 3년간 300만개 공급 계약체결도 임박했다. 브라운 필립스 등 세계적인 가전제품 회사와도 제품공급을 논의중이다. 신 시장은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듯이 회사가 성장할수록 시련의 강도도 세진다”며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없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에센시아의 '또다른 야망'-中 복제품에 품질로 승부…살균기 전문기업 '노크'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 맞은 편에 위치한 에센시아 본사. 2층 사장실에 딸려 있는 작은 방에서 나온 신충식 사장은 “3년 동안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며 “회사가 살균기 종합업체로 입지를 굳힐 때까지 계속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회사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중국과의 질긴 악연 때문이다. 2003년 한 중국회사가 중국 진출을 도와주겠다며 회사의 중요 기밀을 받아 간 뒤 오히려 값싼 복제품으로 뒤통수를 친 것.
그 뿐만이 아니다.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2006년 중국공장 설립을 시도했으나 제품 검수과정에서는 별 이상 없던 제품들이 사용 중에 잦은 고장을 일으켜 결국 포기했다. 신 사장은 “한국 사람들의 손기술과 꼼꼼함은 세계 최고“라며 “값싼 노동력만 믿고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가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낮은 가격을 앞세워 파상 공세를 펼치는 중국제품에 대해 “사람이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하듯, 제품도 오래가려면 품질이 좋아야 한다”며 “이제는 고부가가치의 ‘made in korea’로 승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연간 50만대의 생산능력을 250만대까지 늘릴 계획이다.
그는 자체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는다. 글로벌 시장에선 유연성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필립스 브라운 등 세계 유수의 가전제품 업체와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OEM) 납품을 협의중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신 사장은 사업 아이템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 자체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업은 나무를 키우는 것과 같아서 꾸준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살균기 하나로만 세계를 제패하는 꿈을 꾸고 있다. 신 사장은 “치약 하나만으로 세계 일류를 일꾼 기업도 있다”며 “욕실 주방 야채 공기 살균기 등을 꾸준히 개발해서 살균기 전문기업으로 명성을 쌓고 싶다”고 밝혔다.
안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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