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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 전문 부대 첫 발굴현장 르포 / “님들의 조국애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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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 전문 부대 첫 발굴현장 르포 / “님들의 조국애를 기억합니다”

입력
2007.03.1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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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진동지구 56년만에 올리는 진혼의 경례

*참호 20~30㎝ 파도 유해·유품

*짐승들 훼손한 흔적에 눈시울

*유전자 정밀감식후 유족들 품에

“뼈 한 조각 가져가지 못한다. 이제서야 뭣하러 왔느냐.”

8일 경남 함양군ㆍ읍 백연리 하백마을. 몇 명의 노인들이 뒷산으로 오르려는 젊은 군인들을 막아 섰다. 고함을 지르는가 싶더니 멱살까지 잡고 흔들었다. 군인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56년 전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던 촌로들의 고함은 어느새 흐느낌으로 변했다.

1950년 7월 중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 마을은 국방부가 하와이에 본부를 둔 미국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JPAC) 체제를 본 따 올해 1월 창설한 유해발굴감식단(단장 박신한 대령)의 첫 발굴 현장 중 하나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에게 파죽지세로 밀리던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청년들이 자위대, 민보단, 방위대 등 이름으로 참전했다가 산화했다.

시신들이 묻힌 봉분을 확인하고 제사를 지낸 발굴단은 마을회관을 다시 찾아 참전용사와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했다. 전사자의 후손이라며 관련 서류를 잔뜩 가져온 김형도씨는 “늦었지만 군의 도움으로 유해를 찾을 수 있게 돼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발굴단은 “3월 21일에 다시 와서 유해를 모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어섰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이어 유명한 격전지인 경남 마산시 진동면 대평리 야반산을 찾았다. 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을 공략하려는 북한군 6사단을 해병대 등이 격퇴한 곳이다.

1시간 정도 걸어 정상에 오르자 이미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곡괭이와 삽을 들고 차가운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내는 단원들의 ‘영차’ 소리가 야산의 정적을 깨고 있다. 일주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열 번도 더 바뀌었다는 이곳에는 참호 수백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당시 치열한 전투 상황을 짐작케 했다. 표토와 구분되는 아래 지층이 나타나자 단원들은 작은 삽과 붓을 들고 흙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쓸어 내렸다.

발굴과장 이용석 중령은 “20~30㎝만 파 내려가도 탄피, 전투화, 수통 등의 유품들과 뼈가 나오고 있다 ”며 “여기서 나오는 뼈는 매장된 것이 아니라 전사한 뒤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진 군인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과장이 들어올리는 유해 중에는 산짐승의 이빨자국이 새겨 있는 것도 있었다.

발굴단 소속 김병표 이병은 “국가의 부름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산화한 선배들의 모습이 이러한데 요즘 어떤 젊은이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지겠냐”며 “유해를 빨리 수습해 안장하는 것은 나라와 후손들의 도리”라고 말했다.

갑자기 통제장교 김용균 소령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엄정규 병장이 한 참호에서 팔과 다리뼈 일부가 남은 유해 1구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한국군의 유해가 분명했다. 유해와 함께 M1소총 탄피, 판초(비옷) 등 당시 아군이 쓰던 군장비가 나왔기 때문이다. 현장은 한층 숙연해졌다.

발굴과정은 사진병이 한장한장 꼼꼼히 기록했다. 김 소령은 “참호 형태나 안전핀이 그대로 꽂혀 있는 수류탄이 나온 점에서 아군 전사자들은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 발굴된 유해는 약식관(이장관)에 정성스럽게 담겼다. 태극기로 관을 싼 뒤 노제를 지내고 산 아래 임시 봉안소로 옮겼다. 유해의 일부는 감식반과 전문기관 등에서 유전자분석을 거쳐 유가족을 찾아 나선다. 한국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글ㆍ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유해발굴감식단 이용석 중령 “유해 묻힌 격전지에 드라마 세트장이라니…”

유해발굴단 이용석 발굴과장은 “제도적 장치의 미비로 국군 유해들이 짓밟히고 있다”며 “도로 등을 내기 전에 문화재를 먼저 발굴 하듯이 유해가 있을 법한 격전지를 개발할 때도 유해 발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과장은 대표적인 사례로 문경새재에 지어진 드라마 ‘왕건’ 세트장을 꼽았다. 소백산맥 이화령 조령산 등 이 일대가 한국전 당시 북한군의 폭격으로 한국군 1개 대대가 전몰한 곳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해 발굴 작업 없이 세트장(저자거리)이 들어섰다.

그는“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전사는 제외하더라도 인근 주민들의 말에 조금만 귀 기울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가 문경새재 인근에서 만난 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세트장이 된 그곳은 “논주인이 쟁기를 갖다 대기만 해도 사람 뼈가 나와 50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한 곳”이다.

이 같은 상황이 더 이상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과장은 ‘전사자 유해 소재지도(가칭)’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사에 기록된 전국의 격전지 120여 곳을 답사하며 주민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자료집으로 600여 쪽에 이른다. 올 상반기에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발굴단 측은 지자체 등에 이 지도를 비치하면 왕건 세트장과 같은 불상사는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미국 독일의 예를 들며 “이들 나라에서는 유해 발굴은 물론 발굴지역을 성역화 한 뒤 그 곳에서 후세 교육을 하고 있다” 며 “등산객들이 옷깃 한번 여밀 수 있도록 당시 상황을 적은 안내판 하나가 아쉽다”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연세대 법의학과 신경진 교수 "유가족들 적극적 협조가 관건"

“유가족의 동참 없이는 유해 발굴 작업을 통한 유가족 찾기 사업은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없다.”

연세대 법의학과 신경진(41) 교수는 “지금까지 발굴한 1,500여 유해 중 600여 구의 유해 유전자(DNA)감식을 마쳤지만 이를 통해 유가족을 찾은 경우는 22건밖에 되지 않는다”며 “유해 확인을 위해서는 모근(毛根) 제공과 채혈 등 유가족의 협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20년만 지나도 사람의 뼈는 DNA감식이 어렵다는 학계의 주장과 달리 50년이 훨씬 지난 유해에서 유전자를 뽑아 감식에 성공, 국내 DNA감식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신 교수는 한해 평균 100여 구의 유해를 처리하고 있지만 유가족 확인율은 아직도 매우 낮은 편이다. 그는 이에 대해 “한국전 때 산화한 국군은 13만5,000명이 넘지만 신원 확인을 위해 채혈 등 유전자를 제공한 유가족은 2,000명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동안 1,500여 구의 유해만 발굴한 것도 문제지만 유가족들의 협조도 저조했다는 뜻이다. 실제 신 교수는 900여 유해의 DNA를 감식해야 하지만 유가족의 DNA 정보 부족으로 애태우고 있다. 채혈 등은 가까운 국군 병원에 가면 무료로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정민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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