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강의 듣느라고 바쁘겠구나. 그런데 신문을 보니까 대학마다 신입생 대상 취업 특강을 한다고 난리더라. 하기야 요즘에는 토플에 토익에 무슨 무슨 자격증 따랴 대학 4년을 내내 취업 준비로 보낸다지? 그것 참, 세상이 그러니…. 하지만 난 좀 다른 얘기를 해 주고 싶구나. 취업 준비, 군대 걱정 4학년 때 가서 하고 그 때까지는 죽기살기로 마음껏 공부하라고 말이야.
내가 1980년에 대학 들어갔을 때 일이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에른스트 카시러의 《An Essay on Man(인간에 관한 에세이)》을 읽는 게 유행이었어. 대학 도서관에서 1944년 예일대에서 나온 책을 빌렸지. 한 삼백 페이지 되는데 한 두 페이지 읽는 데 단어를 수십 개는 찾았던 것 같아. 내 영어가 이런 수준인가 싶었지.
그런데 반납 기일 1주일이 후딱 지났어. 연장을 했지. 다시 일주일. 어쨌든 다 읽었어. 내가 너무 무식하고, 영어가 너무 형편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지. 그래도 고등학교 때 타임지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 죽기 살기로 공부하라
독일 신칸트 학파의 대가인 카시러가 죽기 1년 전(70세) 평생의 학문과 삶을 담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쓴 글을 한 주만에 읽겠다고 한 그 만용이라니….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남들은 번역본을 읽고 있는 거야! 완전히 헛고생한 기분이었어. 아마 번역본을 읽는 게 내용 이해 면에서는 훨씬 나았을 거야. 하지만 보람은 있었어. 나의 초라함을 처절하게 깨달았으니까.
그러고 나니까 도서관 서가에 버티고 있는 옥스퍼드대 발행 플라톤 전집이 눈에 들어오더구나. 《고르기아스》처럼 한글 번역본이 없는 것만 골라 읽었지.
토마스 아퀴나스 영역본 전집도 있었는데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서 첫 권 서문과 마지막 권 마지막 문단만 읽고 "아퀴나스를 뗐다"고 허풍을 떨었지. 그러고 눈을 들어 보니까 캠퍼스에는 벚꽃 잎이 눈송이처럼 휘날리더라. 그 봄의 냄새라니…. 그런데 덜컥 캠퍼스에 탱크가 들이닥쳤어.
공부 그만 하고 집으로 가래. 정치 군인들이 또 사고를 친 거지.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전세계에서 모인 내 또래 하버드대나 MIT 애들은 밤을 새우고 공부하고 있었을 거야.
카시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대가들의 저작을 읽어라. 성현의 말씀은 당근이고. 서양으로 치면 카를 마르크스, 동양으로 하면 주자 같은 이의 저서는 어지간한 건 읽어야겠지.
동서고금에 태산북두 같은 대가가 즐비하지만 최근에 내가 발견(?)한 대가는 스위스 신학자 한스 큉(79)과 미국 생물학자 스티븐 굴드(2002년 별세)야. 1,000 페이지가 넘는 큉 교수의 《그리스도교》 같은 책은 거의 숨이 막힌다.
굴드는 한글로 나온 《풀 하우스》 하나만 봐도 뿅 가지. 마르크스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익히고, 주자의 인문학적 사유를 체득하고, 자연과학까지 아우른다면 금상첨화겠다. 너무 커서 그 바깥에 아무것도 없고, 너무 작아서 그 안에 더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까지를 들여다 보겠다는 욕심으로 공부하면 좋겠다.
그러려면 영어 말고 외국어 하나 정도는 더 해야 한다. casa blanca('하얀 집'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에서 형용사 blanca가 왜 뒤로 가느냐고 할 정도면 정말 곤란해.
● 대가들을 벗 삼기를
큰 돈을 벌려고 해도 돈에 매달리면 안 되겠지. 끝으로 이이(李珥) 얘기를 해 주고 싶구나. 율곡은 평소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군자(君子)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요임금이나 순임금, 공자 같은 성인(聖人)이 되려고 노력하라.
성인이 되고자 하면 못 돼도 군자가 되지만, 군자가 되려고 했다가 못 되면 소인(小人)밖에 될 게 없다." 큰 학문을 하는 대학 때가 아니면 밥벌이를 잊는 만용을 언제 부려보겠니? 참, 《대학》도 참 좋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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