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에얄 등 지음ㆍ임현진 등 옮김 / 시유시 발행·438쪽·1만8,000원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속속 몰락하자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는 재빨리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헤겔-마르크스가 말하던 진화적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들도 후쿠야마의 판단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진 않다. 대신 그 선정적 구호를 ‘역사의 다양한 종언’이라고 바꾸지 않을까.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이다. 책은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특히 유산 부르주아 층이 빈약한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역이행하면서 밟는 다양한 경로에 주목한다. 자본가>
저자들은 그 대표적 사례로 동유럽 국가의 변동 과정을 실증 분석한다.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가진 계급이 없었던 이들 나라에서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한 것은 교양 부르주아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가사회주의를 공격하던 반체제 지식인이었다. 예상과 달리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귀족 관료는 신체제에서 기존 권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신세대 관료라 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교양 부르주아와 손잡고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서 두드러진,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었다.
이 같은 현상의 분석 틀을 마련하고자 저자들은 베버와 브루디외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전자에선 신분과 계급의 구별을, 후자에선 정치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 등을 포괄하는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빌렸다.
이 관점에서 동유럽의 탈공산주의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역동성이 포착된다. 체제 변동에 뒤쳐질세라 개인들은 앞 다퉈 사회주의적 신분에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정체성을 조정한다.
바꿔 말하면 변화한 환경에 유리한 자본은 늘리고 불리한 것은 버리면서 자본 포트폴리오=아비투스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치열한 적응 과정을 거치며 문화자본을 가진 지식인-기술관료 연합은 정치·사회자본을 갖춘 엘리트 관료를 압도한다. 교양이 권력과 권위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진풍경이 펼쳐진 셈이다.
영미식 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는 것. 저자들은 이 야심찬 기획을 ‘신고전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으로 대표되는 고전사회학이 19세기 근대자본주의 이행을 분석했다면, 신고전사회학은 20세기 말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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