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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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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 연재를 시작하며

입력
2007.03.0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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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화가, 빈의 음악가… 인간은 도시에 ‘영혼’을 주었다

고대 유럽인들이 오리엔트라 불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지 수천 년이 흐른 지금, 인류의 절반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도시에서 죽는다.

중세 이전의 농촌공동체를 이상적 삶의 공간으로 여기는 일부 생태론자들에게는 마땅찮은 일이겠으나, 바야흐로 도시는 인류공동체의 생활양식을 빚어내는 가장 보편적인 거푸집이 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화의 흐름은, 인류를 몰살할 천재지변이나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쉬이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미래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2025년에는 인류의 3분의 2가, 그리고 22세기 초에는 인류의 4분의 3이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다.

봉건 영주의 간섭이 지긋지긋해 돈을 건네고 자치를 산 중세 말기의 자유도시 시민들에게, 도시의 공기는 자유의 공기였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신도시’에 더듬이를 곤두세우는 21세기 한국의 건설업자들이나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도시는 일확천금의 무대다. 중세 자유도시 시민들에게든 21세기 ‘신도시’의 이해관계자들에게든, 도시는 장사의 공간이고 돈의 거처다. 그러니까 도시는 시장이다.

“신은 촌락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거나 “도시는 얼굴을 갖고 촌락은 영혼을 갖는다”는 격언은 흔히 촌락의 자연성에 대조되는 도시의 인위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도시의 그 인위적 얼굴이란 곧 시장의 얼굴이고 촌락의 자연적 영혼이란 곧 시장 이전의 영혼이라 해석해도 될 게다. 한국어 ‘도시(都市)’라는 말의 ‘시(市)’가 이미 저자, 곧 시장을 뜻한다.

한편, 도시라는 말의 ‘도(都)’는 왕궁 소재지, 곧 정치중심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도시는 정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폴리스)를 이루는 시민(폴리테스)과 관련된(폴리티코스) 일들이 바로 정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 단어 political이나 politics는 도시가 곧 정치공간이었던 고대 그리스(어)의 유물이다. 고대 로마의 시민동료(키위스)들이 모여 이룩한 도시(키위타스) 역시 정치의 공간이었다.

그 어원을 라틴어 ‘키위타스’에 두고 있는 프랑스어 ‘시테’(도시)나 영어 ‘시티’(도시)가 그 시작부터 ‘정치체(政治體)로서의 도시’라는 뜻을 어렴풋이 지니고 있었듯, 그 말들에서 파생한 프랑스어 ‘시투아앵’(시민)이나 영어 ‘시티즌’(시민)도 단순한 ‘도시거주자’라는 뜻 외에 ‘조직된 정치공동체의 일원’ 곧 정치행위의 담지자라는 뜻을 겸하고 있었다.

볼테르에게 연원을 두고 있는 ‘세계시민’(citoyen du monde)이라는 표현이나 프랑스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의 가사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Aux armes, citoyen!)에서, 시민은 또렷이 정치의 주체다. 그러니까 도시는 경제의 공간이자 정치의 공간이다.

더 나아가 도시는 문명(civilisationㆍ이 단어의 어원도 고대 로마 사람들이 동료시민을 가리켰던 ‘키위스’에 닿아있다)의 공간이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도회풍이라는 말은 세련되고 우아하고 예의바르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영어 단어 urbanity는 ‘도회풍’이라는 중립적 뜻과 ‘세련됨’이라는 긍정적 뜻을 겸하고 있고, 그 복수형 urbanities는 ‘예절바름’이라는 긍정적 뜻을 지녔다.

반면에 한국어 ‘촌스럽다’에서 보듯, 시골과 관련된 말이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일은 드물다. 이것은 불공평한 일이기는 하나, 도시(의 활기차되 기생적인 삶)에 대한 인류의 오랜(그리고 어쩌면 정당한) 허영을 반영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도시들은 닮았다. 그 닮음의 배후엔 도시화라는 것이 흔히 ‘세계화’와 겹친다는 사정이 놓여 있다. 나는 지금 세계화라는 말을 아주 느슨하게 쓰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세계화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가속화한 시장 통합 과정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헐거운 세계화는 1492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밟으면서 시작됐을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중국과 고대 유럽 사이의 교섭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세계화라는 말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정치공동체 사이에 이뤄지는 교류 정도의 의미로 쓰고 있다.

그 교류들은 부분적으로 전쟁을 수레로 삼아 이뤄졌다. 그런 헐거운 의미의 세계화를 통해 도시들은 일찍부터 서로 닮기 시작했다. 이미 서력기원 이전에 파키스탄 지역의 몇몇 도시들에는 그리스 로마 풍의 불교예술작품들이 들어섰다.

이른바 간다라미술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몇몇 도시들엔 이슬람풍 건물들과 가톨릭풍 건물들이 뒤섞여 있다. 서울의 덕수궁 석조전이나 한국은행, 서울역 그리고 지금은 철거된 옛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따위의 건물에선 유럽 냄새가 물씬거린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평양 거리를 보다 보면 문득 러시아의 어떤 도시들이 떠오른다.

한국의 고층아파트들은 좀 별난 풍경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아파트는 현대 도시인의 일상 거주 공간이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려면 복층 건물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아파트는 현대 도시의 한 상징이다. 아파트말고도 현대 도시들을 서로 닮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많다. 대형 백화점과 할인매장, 지하철과 현금자동지급기, 맥도널드 햄버거와 켄터키프라이드치킨, 호텔 체인과 분수대, (특히 겨울철의) 루미나리에 같은 것들이 그렇다. 유럽의 언어가 세계 대부분 지역에 침투했듯 유럽의 건축 양식과 라이프스타일도 세계 대부분 지역에 뿌리를 내려, 오늘날의 도시들은 점점 더 비슷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 도시의 거주자들, 한때는 정치적 아우라에 휘감겨 있던 ‘시민’들은 이제 이른바 ‘메트로(지하철)-불로(일)-도도(잠)’의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반복하거나, 그 일상에서 퉁겨져 나와 범죄자가 되거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움켜쥐려는 야심을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키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탈도 일상이다.

그들은 사랑하고 미워하고,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죽고 죽이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도시의 일상을 만든다. 그 도시들 가운데 몇몇은, 예컨대 서울이 그렇듯, 24시간 깨어있다. 그리고 그 깨어있는 도시인들의 일상은, 촘촘한 경제의 그물에 걸려, 케이프타운에서든 모스크바에서든 엇비슷하다.

그렇게 도시들은 닮았다. 그러나 닮았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다. 그 다름은 오래된 건축물이나 박물관의 유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름은 비슷한 듯 보이는 일상 속의 도시인들, 그 시민들의 ‘영혼’ 속에도 있다. 서울의 중심부와 도쿄의 중심부가 비슷해 보이고 서울 사람들의 일상과 도쿄 사람들의 일상이 닮았어도, 그 도시의 내면, 시민들의 내면까지 꼭 닮은 것은 아니다. 특정한 도시의 공간은,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내면 속에 ‘세계화’의 동화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어떤 고갱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도시들이 제가끔 겪은 역사의 중량 덕분이다. 역사의 울타리 속에 간직된 그 고갱이가 서울을 서울로 만들고, 서울사람을 서울사람으로 만든다. 나는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는 그 고갱이를 그 도시의 ‘영혼’이라 부르려 한다.

그러니, 영혼은 촌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도 있다. 사람들이 파리에서 무수한 화가들을 떠올리고 빈에서 무수한 음악가들을 떠올리는 것은 상투적인 만큼이나 정당하다. 빈의 영혼은 그 무수한 음악가들의 영혼이고, 파리의 영혼은 그 무수한 화가들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 영혼은 그 도시들의 미술관이나 극장 둘레만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광장에, 지하철에, 아파트에, 카페에, 호텔객실에, 택시 좌석에, 기차역에, 사람들의 발걸음에 깃들여 있다. 그 영혼은 그 도시를 찾은 이방인의 영혼과 교섭한다. 어떤 도시를 방문한다는 것은 그 도시의 영혼과, 그 도시 사람들의 영혼과 교감한다는 뜻일 테다.

매주 수요일 독자들을 만날 <도시의 기억> 은 내가 외국 도시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그런 교감의 기억이다. 이 기억의 서술이 정보나 교양의 전시장이 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털어놓는 게 좋겠다.

우선, 나는 내 또래 사람들과 견주어도 외국엘 많이 돌아다녀 보지 못했다. 더구나 그 도시들은 거의 유럽과 미국의 큰 도시들이어서,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할 테다. 또 나는 그 도시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할 만큼 거기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30대 후반 다섯 해를 산 파리를 제외하면, 내가 그 도시들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한 달, 짧으면 하루 나절이다.

그 짧은 체류의 농도를 높이기 위해 그 도시들의 문화적 상징이라 할 미술관이나 성당이나 극장엘 탐욕스레 돌아다닌 것도 아니다. 그러니 <도시의 기억> 에서 어떤 ‘문화예술 탐방’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이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도시들의 기억이 실제와 늘 부합하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게 일기 쓰는 버릇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설령 내가 그때그때 여행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놓았다 하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그리고 그 결과로서 우리의 기억은 늘 다소 왜곡되게 마련이니 말이다. 기억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떠밀려 휘기도 하지만, 최초의 인식 자체가 고스란하기 어렵다. 고스란하기는커녕 공정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는 늘 인식의 대상을, 따라서 기억의 대상을 고른다. 그것은 사람의 뇌 용량과도 관련 있을 테고, 의식 안팎에 자리잡은 우리들의 욕망과도 관련 있을 테다. 두 사람이 하루 나절 똑같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고 해도, 그들이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들의 서로 다른 욕망은 인식의 대상을 서로 달리 고르고, 기억의 대상을 서로 달리 고른다. 그래서 <도시의 기억> 은 나 자신의 매우 사사로운, 편파적인 기억이 될 것이다.

종교가 없는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앞에서 이 말을 여러 차례 썼다. 사실 내가 이 말에 담고자 했던 것은 ‘흔적’이나 ‘무늬’ 정도의 뜻이었으나, 나는 ‘닭살스럽게도’ 영혼이라는 말을 취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종교를 백안시하는 내 이성 저 밑에 종교적 경건함이라 부를 만한 의식의 말랑말랑함이 원래부터 슬그머니 자리잡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내가 가본 도시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도시들의 영혼을 찾아볼 생각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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