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었는데, 집에 적십자 회비 지로용지가 와 있었다. 인터넷 뱅킹으로 납부하려고 지로용지를 가만가만 살펴보다 보니, 한귀퉁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북한 지원에는 여러분이 내신 적십자회비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대한적십자사의 소심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 문구는, 한편으론 이해도 되면서도, 또 한편으론 씁쓸함을 감출 수 없는, 그런 양가적인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역시나 문제는, 누가 국경을 초월한 봉사단체인 적십자사에게, 그런 소심한 문구를 적게 만들었는가에 있었다. 적십자 회비란, 일종의 기부이다.
기부란 무엇인가? 물물교환만이 최대선인 자본주의적 가치에서 한 발 비켜선, 그럼으로써 제도 위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행위가 아니던가. 한데, 그 기부 위에 정치적 문구를 삽입시킨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의 모든 행위를 정치적인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증거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국면은 우리 모두가 만든 것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적십자 회비 납부기간은 이달 말까지다. 정치적인 우려나 불만은 일단 접고, 회비나 내고 떠들자.
소설가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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