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3ㆍ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한 제암리 학살 사건의 은폐 과정이 담겨 있는 사료가 발견됐다.
28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3ㆍ1 독립만세운동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ㆍ1861~1922) 대장이 쓴 15년간의 일기 등 모두 7,200여점의 사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아들인 고(故)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ㆍ참의원의원 역임)와 손자가 대를 이어 보존해 오던 것이었다.
정보수집과 여론조작 등에 능하던 우쓰노미야는 일기 등을 통해 조선 독립운동 진압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회유 공작의 실태를 상세하게 남겼다. 특히 대표적인 일제의 만행 중에 하나인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기술은 한국이 잘못된 사실을 교과서에 기재해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고 강변해온 보수ㆍ우익세력의 주장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제암리 3ㆍ1운동 순국기념관’에 따르면 1919년 4월 15일 오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중위는 11명의 부하와 일본인 경찰 1명과 함께 제암리에 도착해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했다. 만세운동 주동자를 토벌하기 위해 제암리에 출동한 일본 군인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명을 숨지게 했다. 이들은 이웃 마을인 고주리에도 찾아가 천도교인 6명을 추가로 총살했다.
우쓰노미야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이 같은 일본군의 만행 사실을 조작했다. 1919년 4월 18일자 일기에서 그는 “사실을 사실로서 처리한다면 가장 간단하지만…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돼 제국의 입장에는 매우 불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른 간부와 협의해 “(제암리 민중이) 저항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 밤 12시에 산회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그는 다음날 아리타 중위에 대해 “진압의 방법과 수단이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돼 30일간의 중(重) 근신을 명령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대로 징계를 내렸다.
무단정치에 대한 조선인의 “원망과 동요는 자연스럽다”고 적는 등 일제의 통치방법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반일파로 여겨지는 조선인과의 접촉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정확한 의중은 알 수 없지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종의 회유공작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강덕상(姜德相) 시가(滋賀)현립대 명예교수(조선근현대사)는 이번 사료에 대해 “그동안 연구에서 알 수 없었던 부분을 메워주는 조선ㆍ일본근현대사의 제 1급 사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일본의 이와나미(岩波)서점은 우쓰노미야의 일기를 ‘일본육군과 아시아 정책, 육군대장 우쓰노미야 다로 일기’(전 3권)라는 제목으로 4월 이후 발간할 예정이다.
도쿄=김철훈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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