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가에 오랫동안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압구정동에 가면 손바닥만한 맞춤 옷집이 있는데 대한민국 1% 상류층 여성들이 단골이라는 것이다. 내로라 하는 재벌가 사모님부터 여성 정치인까지 전화 한 통으로 옷을 주문하고 운전기사들이 와서 옷을 찾아간다는 곳. 괜한 시선이나 구설에 오르는 것을 꺼리는 상류층의 속성상 알음 알음 소개를 통해 영업을 하기 때문에 겉 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단골 고객의 화려한 면면을 짐작할 수 없다는 곳, ‘압구정동 맞춤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곳. 과연 그런 집이 있을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점 맞은편에서 한 블록 뒤로 돌아 100m 남짓 들어갔을까, 왼쪽에 ‘프리마리 디비’라고 쓰인 허름한 간판을 단 양품점이 나왔다. 11평 매장은 쇼윈도와 응접실, 뒤편으로 난 작업실로 나뉘어 어른 서너 명만 들어서도 꽉 찰 만큼 비좁다. 디자인 실장이자 대표 김귀임씨가 전현직 여성 장관을 비롯 굴지의 재벌가 사모님, 정치인들을 맞이하고 있는 공간이다.
●돈과 지위가 구속이 되는 사람들
김씨는 “햇수로 17년째 소위 특권층 여성들을 상대하다 보니 통념과는 상당히 다른 그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게 되더라”고 운을 뗐다.
“돈 많고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일상의 구속도 많다는 것을 느껴요. 돈이 없어서 고가 디자이너 브랜드를 못사는 분들은 아니고, 구설에 오르지않기 위해 일부러 무난하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력하죠. 운전기사들이 다 있지만, 매장에 올 때는 일부러 차를 멀리 대고 오고 옷도 좀 소박하다 싶게 입거든요.”
‘압구정동 맞춤집’은 사실상 1990년부터 시작됐다.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하고, 디자이너 부틱과 의류수출업체 디자이너로 일하던 김씨가 1990년 한 투자자와 함께 신사동 광림교회 부근에 맞춤집을 낸 것이 시작. 당시만 해도 유명 해외 브랜드들이 국내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1년이면 3차례 밀라노와 파리로 출장, 최신 샘플과 고급 원단을 구비하고 맞춤옷을 제작하는 매장은 금세 유력 재벌가 사모님들의 눈길을 끌었다. 96년 프랑스로 유학, 파리의상조합에서 입체재단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99년에 독립,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재벌가는 세련미, 국회의원 부인은 소박함, 정치인은 TV화면에 신경
김씨는 소위 명품을 보는 시각도 특권층은 상당히 다르다고 말한다.
“대기업 임원급 사모님들은 샤넬이나 루이비통이라는 이름에 흥분하지만 정말 상류층은 오히려 라벨에 신경 안쓰세요. 명품이라도 국내에 들어오지않은 디자인이면 좀 찾을까? 대신 소재와 색상에는 아주 민감합니다.”
대한민국 1%라도 지위에 따라 선호하는 스타일에는 미묘하나마 차이가 있다. 재벌가 사모님들이 점잖되 세련되고 지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유형이라면, 국회의원 부인은 유권자인 동네 사람들과 무난하게 섞일 수 있는 조촐하다 싶은 디자인을 선호한다. 본인이 직접 TV등을 통해 노출될 일이 많은 여성 정치인은 스타일보다 브라운관에 가장 잘 나오는 색상을 중요시 한다. 환타색이나 옥색, 파스텔의 연두색 등 자연 채광에서는 다소 촌스럽다 싶은 색이 화면을 잘 받는다는 이유로 선호된다.
“투피스가 기본인데 재벌가 사모님이나 국회의원 부인들이 대부분 바지 정장을 찾는 반면, 여성 정치인들은 치마정장을 많이 하는 것도 특이해요. 아무래도 여성 정치인은 너무 세련돼 보여도 안되고, 너무 남자 같은 느낌을 줘도 국민정서에 맞지않는다고 판단하는 것 같아요.”
날씬해보이고 싶은 욕구는 파워우먼이라고 다르지않다. 대부분 40~80대 여성들이다 보니맞춤을 할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소재다. “샤넬류의 트위드 소재는 대체로 몸이 나 보인다고 싫어 하세요. 날렵한 느낌을 주는 매끄러운 울이나 실크 소재를 좋아하죠. 모 재벌 사모님은 80대인 데 트위드는 잘 뜯긴다고 싫다고 하더군요. 마직도 꺼리는 소재예요. 잘 구겨지기 때문에 체신머리 없어 보인다는 거죠.”
●가봉 거르지않는 프로슈머
보통 한 번 들르면 평균 70만~100만원대 투피스를 2벌 정도 맞춘다. 많이 찾는 고객은 연중 10번도 온다. 알려진 것과 달리 전화 한 통으로 주문을 끝내는 무성의한 고객은 거의 없다. 다만 완성품을 기사가 수령해 가는 경우는 꽤 된다.
“단골 고객의 사이즈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만큼 훤하지만, 대부분이 직접 와서 스타일을 고르고, 가봉도 거르는 법이 없어요. 그만큼 자기 자신에 관한 컨트롤이 철저합니다. 가격을 깎지는 않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100% 요구하고 응답받기는 원하는 당당한 소비자이기도 하죠.”
처음 창업할 때 만해도 주변 건물 1층은 거개 맞춤 옷집이었지만 지금은 다 없어졌다. 김씨의 매장도 전성기인 90년대 중반에 비하면 매출이 50% 선이다. 그러나 김씨는 “아무리 고가의 유명 해외브랜드가 쏟아지는 시대라도 소수를 위한 맞춤시장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류층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내가 입은 옷이랑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하고 마주치는 거예요. 아주 질색하죠. 맞춤옷은 같은 스타일이라도 내 몸에 맞게 변형되고 소재와 색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잖아요. 틈새시장이 될 수 있는 강점이지요.”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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