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에서 군주 되기'라는 말이 있다. 요즘 들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식탁이라는 공간은 아버지의 권위가 가장 근엄하게 관철되고 확인되는 자리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흔히 예절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분분은 밥상을 앞에 두고서 가르쳐지고 신체에 각인됐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누가 먼저 숟가락을 드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맛있는 반찬을 어떤 방식으로 각자에게 할당하는가 하는 문제, 또는 음식을 먹는 도중 이야기를 꺼내거나 끝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반복적인 교육이나 무언의 시범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수되었다.
●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아버지
평소 아무리 잔소리가 심한 배우자나 똑똑한 자식이라 해도 밥을 먹는 순간 만큼은 지금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누구의 노고 덕분인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었다.
식구(食口) 즉 '먹는 입'들이 모여 앉은 그 순간 만큼은 원시시대 모닥불 옆에 잡아온 사냥감을 에워싸고 모여 앉은 혈거인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가부장의 권위는 먹이의 확보와 분배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의 출발을 가족 모델에서 찾은 사람이 프로이트만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라는 존재는 은유적인 차원에서나 실질적인 차원에서나 한 공동체 내부에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며 동의를 창출하거나 적을 설정하는 데 있어 더없이 유효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의 권력은 신성시될 수도,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완전히 폐기되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의 향방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유통되는 아버지의 상징에 유달리 민감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나라는 어떤 식으로든 모두 아버지의 상징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휴전선 북쪽의 정권은 아예 유훈통치라 하여 죽은 아버지의 후광에 의존해서 연명하고 있으며, 남쪽 역시 생물학적 수명을 다한 통치자가 심심하면 불려나와 정치적 여론 조성에 한몫을 하고 있다.
그 통치자가 살아서 여러 강압적 정책을 시행하고 있을 때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고 또 고귀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살아 남았다. 그를 육체적 죽음으로 몰고가는데 일정하게 기여한 이 땅의 민주세력은 그러나 그에게 상징적 죽음을 안겨주는데 명백하게 실패하고 있다.
● 남도 북도 아버지에 '들려'
냉혹한 독재자인 그는 죽은 뒤에도 사라지기는커녕 유령이 되어 오랜 기간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최근 차기 대선과 관련하여 경제 대통령이니 정치 대통령이니 하는 언급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부질없는 말씨름은 그 참담한 증거이다.
지난 10여년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가 차츰 익혀가고 있는 것은 죽은 아버지를 '다루는' 것은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것보다 한층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경제 우선'이라는 논리 아닌 논리로 죽은 독재자를 숭배하는 것은 단지 '계몽의 부족'에서 기인한 현상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산 자들끼리만이 아니라 죽은 자와도 협상하고 거래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 모른다.
과거의 매장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서 그가 무덤에서 편히 영면을 누리게 하기 위해선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보다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진우 시인ㆍ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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