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도 첸나이의 현대차 공장을 방문해 해외 전진기지의 중요성과 기술력 제고를 강조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비자금 사건과 관련한 이달 초 1심 법원의 실형 판결에 적이 낙담한 탓인지, 당분간 대외활동을 접고 국내 현안을 챙기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안타까웠는데, 해외현장을 챙기며 임직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 환율ㆍ노조 타령에 실적 급락
참,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 스페인 방문 중 기아차 관계자들을 만나 정 회장의 법적 상황을 배려한 듯 "대통령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더군요.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힘이 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쁜 뉴스도 있습니다. 뉴스위크가 최근호에서 "현대차가 고비용 저효율 구조와 잦은 노사분규로 인해 GM과 포드 등 미국 자동차회사의 잘못된 선례를 닮아가고 있다"고 꼬집으며 '디트로이트의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고 충고했더군요.
사실 정 회장의 개인적 처지와 별개로 현대차의 앞날을 생각하면 답답함이 앞섭니다. 2010년까지 '글로벌 Top5'에 진입한다는 청사진의 실현은커녕 수성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지난해 현대차의 매출은 전년 수준에 그쳤고 영업이익은 10.8%, 순이익은 무려 35%나 감소했습니다.
만성적 노사문제에 메가톤급 환율-유가 폭탄이 엄습한 결과라고 하나, 참담한 뒷걸음질입니다. 파업으로 인한 손실만 1조 6,000억원을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경영환경이 다소 나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는 매출 13%, 영업이익 6% 증대를 목표로 제시했더군요. 그러나 1월 실적을 보면 GM대우 르노삼성 쌍용차가 1년 전보다 각각 30% 이상의 매출신장을 기록한 반면 현대차는 오히려 2%나 감소했고 북미지역 법인은 차가 팔리지 않아 재고가 적정수준의 3~4배에 달한다는 얘기까지 들리더군요. 미국과 유럽의 주요 자동차업체 역시 고전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기엔 상황이 심각합니다.
해답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따져보면 정 회장의 신년사에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젠 양적 성장을 넘어 전 세계 고객들로부터 현대ㆍ기아차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이를 통해 안정적으로 수익성을 유지해야 한다.
연구개발에서 정비에 이르는 각 부문별로 시스템 경영을 확립해 경쟁력을 높이고, 브랜드나 감성품질 등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회사 주인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데도 노조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경영까지 권력을 행사하고, 환율 등 외부환경에 경영난의 책임을 돌리는 간부들이 즐비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 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있었던 지난달 16일의 결심공판, 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이달 5일의 선고공판 전후의 사정을 반추해보면 몇 가지 실마리가 잡힙니다.
성과급 문제로 촉발된 노사 갈등이 시무식 폭력사태로 이어지고 다시 파업으로 연결된 상황을 떠올려보죠.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는 노조의 실상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기에 회사는 원칙의 잣대로 결단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노사는 검찰 구형 다음날 애매모호한 문구로 서둘러 협상을 타결했습니다. 이후 회사 관계자들은 백방으로 정 회장 구명을 위해 뛰고, 1심 판결 후엔 초조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 의연한 리더십만이 회사 살려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지는 몰라도, 솔직히 정 회장이 처음부터 "내 문제는 내가 책임진다. 잘못한 일에 대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
그러나 이를 약점 삼아 이용하려거나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하는 행위는 좌시하지 않겠다. 현대차가 살아야 내가 산다"고 단호하게 잘라주길 기대했습니다.
이런 의연한 태도와 내실 있는 경영실적만이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회장을 풀어줘야 회사가 잘 된다"는 식의 얇은 논리는 냉소를 살 뿐입니다. 현대차의 새 출발은 원칙과 뚝심에 바탕한 정 회장의 리더십이 회복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항소심에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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