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이후 3·1운동이 있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을 독립을 준비했다. 그것도 단순한 준비과정이 아니라 과거의 민족운동, 즉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을 반성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했던 것이다.
● 갈등 넘어 민족이 하나 됐던 운동
그 결론은 바로 민족운동 통합과 운동노선 통일의 담론이었다. 과거의 분열을 지양하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한데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병운동자들은 계몽주의자들이 가진 근대 사회이념을 수용하였고, 계몽운동자들은 의병운동자들의 투쟁방략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 3·1운동이다.
3·1운동에서는 운동 세력과 이념과 투쟁방식이 통일되고 통합되었다. 3·1운동은 국제 정세에 민감했던 계몽주의를 계승한 민족대표들이 계획하고 추진하여 발발시켰다.
그것도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민족세력이 종교적 편견을 뛰어넘어 통일전선을 이뤄가며 일으킨 것이다. 학생을 비롯한 농민대중은 3·1운동을 대중화하여 전국적으로 전파하였다. 여기에는 각 지방의 유지로 알려진 유생층의 힘도 컸다.
이들은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배하러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자기 고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농민대중과 봉건 지성인 유생층, 그리고 근대 지성인 학생, 종교인들이 3·1운동을 확대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겨레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한마음 한뜻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종교적 편견도, 지역적 갈등도, 계급과 계층의 위화감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조국광복과 민족독립, 그리고 민족정권 수립 열정만이 들끓었던 것이다. 3·1운동 만세시위는 전국 218개 군에서 무려 1,500여 차례나 전개되었고, 남녀노소는 물론 유생 교사 학생 종교인 상공인 농민 노동자 등 각계각층 200여만명의 겨레가 참여하였다.
그 결과 3·1운동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시켜 1910년 이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의 맥을 잇게 하였다. 그것도 예전 대한제국의 군주국체제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 통합의 정신, 오늘 더 절실해
이같이 각계각층이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정신은 오늘의 상황에서도 아주 절실하게 요구된다. 대북(對北)문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립이 고조되고, 동서간의 지역갈등이 지속되며,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계층 간의 양극화 현상 또한 날로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 화해와 협력을 진척시켜 민족통일을 이루고, 지역과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민족통합의 3·1정신이라 하겠다.
오늘 3·1운동 88돌을 맞이하여 우리는 온 겨레가 떨쳐 일어나 한마음 한뜻으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갈구했던 3·1정신을 되살려 민족통일은 물론 동서 지역갈등과 양극화 해소, 그리고 민족발전의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3·1운동을 기념하는 뜻일 것이다.
이병구ㆍ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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