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세상에 자기 주장들이 흘러 넘쳐서 오히려 의사소통 부재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느낌이다. 자기 주장만 펼치다 보니 정작 타인의 말을 들어줄 귀가 열리지 않고, 그나마 귀에 들어오는 말도 자기 생각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대화를 나눈다고들 하지만, 정작 대화의 장소를 마련해 놓아도 대화라기보다 자기 주장만 저 혼자 외쳐대는 독백의 장소가 되기 일쑤다. 이러다 보니 만인의 주장이 저 혼자 외치는 만 가지의 소리로 들끓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자유이고 민주주의라면, 이제 그 만 가지의 주장과 말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묻고 싶다. 만 가지의 입장과 서로 다른 만 가지의 태도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성숙된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자기 주장만 넘쳐나는 세상
그러나 막상 만 가지의 자기 주장들을 분명한 입장으로 밝히라고 하면, 그 시끄럽던 만 가지의 소리들이 사라져 버린다. 뒤에서 술 한 잔 마시면서 불평을 털어놓을 말들을 어떻게 공개적으로 밝히는가 오히려 반문을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만 가지 자기 주장들은 사실 주장이라기보다 시정잡배들의 불평불만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정잡배 민주주의이며 불평불만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판국이라면 만 가지의 자기 주장들은 만인에 대하 만인의 투쟁으로 번지기 마련이고, 결국 조절도 통제도 불가능한 혼돈에 떨어진다.
자기 주장들만 무성하고 자기 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세상은 아무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실천을 위한 합의에 이를 수 없고 반대를 위한 반대의 뻘밭에 발이 묶여 버린다. 이렇다면 우리의 미래에 펼쳐지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뻘밭이고, 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 뻘밭의 개처럼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할 뿐이다.
이제 그 만 가지 자기 주장들의 실체를 밝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자기 주장이 분명하다면, 분명한 자기 입장과 태도를 지녀야 하고, 그것은 곧 자기신념으로 성립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신념체계를 상실한 민주화를 향해 질주하지 않았는가. 선생이 선생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선배의 조건없는 배려도 후배의 조건없는 예의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서로의 실리와 이득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내세우는 명분들은 거의 중도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중도에 중도의 신념체계는 준비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중용의 미덕과 공존의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중도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비빔밥처럼 뒤섞이어 결국 모두 한 가지 입맛으로 통합되는 사상이 아니다. 중도는 개성과 다양성이 원칙이다.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며 합의는 어떻게 도출해 내는가? 여기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들어주는 귀가 열리고, 서로 다른 입장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하기 때문에 합의는 다양한 생각 속에서 선택된다.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고, 자기 주장이 아닌 타인의 입장이 선택되어도 결국 우리의 입장으로 합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된 민주주의의 중도론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 사회의 중도는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위해 임의적으로 모이는 패권주의의 혐의가 짙게 풍긴다.
● 故 이형기 시인의 말씀
그래서 요즈음 들어 부쩍 '너는 누구 편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여기에 대해 답변하지 않으면 일단 줄서기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다는 은근한 불안감까지 조성한다.
세상이 이러다 보니까, 자기 주장들을 두서없이 펼치다가도 눈치를 보거나 어느 날 갑자기 발 빠르게 움직이는 쥐들의 행렬을 본다. 이런 세상 속에서 문득 생각나는 선생이 있다.
그분은 정치가도 사상가도 아닌 시인이다. 고 이형기 시인은 생전에 "1인 1당의 당수가 되시오"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의 발언처럼 들리지만, 지금 상황에서 우리 자신에게 먼저 전제되어야 할 좌표처럼 들린다. 나는 내 편이다라는 입장 정리가 된 후에 서로 다른 다양한 입장들과 만나면서 자신의 선택이 필요한 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윤택 / 극작ㆍ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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