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그룹 회장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징역 3년을 선고한 직후 시민단체 등에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시켜주기 위해 형량을 낮춘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제기됐다. 아닌 게 아니라 법조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참여연대 조사결과, 2000년 이후 배임ㆍ횡령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기업인 29명 중 62.1%인 18명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몽원 전 한라그룹 회장 등은 1심에서 정 회장과 같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선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나머지 기업인 11명 중에서도 ‘대어급’ 6명은 형량이 대폭 깎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국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항소심 재판부의 ‘관용’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대법원이 26일 사상 처음 소집한 전국 항소심 재판장 회의에서 1심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자고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서 장윤기 법원행정처장은 “항소심이 1심 판결을 파기하는 비율이 높아 ‘온정주의적 양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며 “1심 재판부를 강화하고 항소심에서는 감형 사유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항소심 재판장들도 대부분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고등법원의 형사사건 1심 판결 파기율은 48%, 1심 형량 변경률은 37%에 달했다. 이는 ‘항소를 하면 무조건 형량이 낮아진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고, 피고인의 52.3%(형사합의부 기준)가 항소 대열에 동참했다. 10%대인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항소율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이는 ‘전관예우’ 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적 토대가 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항소심 재판장들은 이런 비판들을 고려해 직권 파기 등을 자제하고 지나치게 부당하지 않다면 1심 선고내용과 양형을 최대한 존중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또 피고인의 ‘묻지마 항소’를 줄이기 위해 미결구금일수(형확정 전의 구속기간을 형확정 후 형량에 포함시켜주는 것)의 일부만 인정해주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대법원은 4월 양형위원회를 구성해 2년 일정으로 양형과 관련된 구체적 기준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용담 대법관도 이날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신임 형사재판장 연수에서 기존 재판 관형을 강력 비판했다. 김 대법관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양형은 사법신뢰와 직결되는 문제”라며 “법관은 외부 압력이나 권력을 이겨내고 정의를 실현해 권력과 돈이 있는 자들이 자신의 몫과 분수를 제대로 알고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데 있어야 할 숨막히는 긴장감은커녕 이해하지 못할 전문용어가 난무하고 법조전문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류만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판사가 심증을 형성하는 곳은 집무실이 아니라 법정’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피고인에게 충분한 진술기회를 부여해야 하며 충실한 증거조사와 소송 지휘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국민으로부터 보상 받을 수 있는 판사가 될 수 있다”고 당부했다.
박진석 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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