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에서는 창작극 분야가 봄 가뭄을 겪고 있는 듯하다. 그 빈 자리를 등장인물의 이름을 슬쩍 우리 것으로 바꿔 얹은 외국작품 번안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괴테는 말했다. ‘한 나라의 말은 외국의 말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이마셔버리는 것이다.’ 번안물 또한 우리 모국어의 자장 안에서 생산된 연극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 삶의 맨 얼굴을 엿볼 수 있는 창작극을 만나면 좀 더 반갑다.
작년 7월부터 해를 넘겨 번역극이 우세한 공연 환경 속에서 창작극 한 편이 선전하고 있다. 그간 <절대사절> ,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 등을 통해 소시민의 삶에 드리운 일상적 부조리를 눈 밝게 들춰낸 극작가 선욱현의 2002년 초연 작 <의자는 잘못 없다> 가 그것이다. (김태수 연출, 극단 완자무늬) 의자는> 거주자> 절대사절>
이 연극은 자본주의 시장 사회에서 ‘가치’와 ‘가격’의 발생과 결정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쉽게 녹여놓았다. 실직 중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 사내는 가구점 앞 전시용으로 내놓은 의자 한 점에 매혹된다.
이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가구점 주인과 사내 사이 흥정이 오간다. 와중에 의자 제작자인 주인 딸, 생활력 강한 사내의 아내가 끼어 들면서 거래는 지연되고 소동은 증폭된다. 의자를 향한 맹목적 욕망은 급기야 부부 사이의 파경, 주인 딸의 자살 등 일파만파로 번져간다.
현실의 이전투구 속에서 보호 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순수성과 인정투쟁, 주관적 가치 매김과 불일치 하는 가격 결정구조, 욕망이 좌우하는 시장의 수급법칙,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란 등 잘 구운 파이만큼이나 음미할 생각의 겹들이 풍성하다.
이야기 갈래의 다양한 선택을 통해 결말이 달라질 수 있도록 한 기법 또한 극 논리 안에 잘 짜여있다. 하지만 부록에 해당하는 종막 부분이 좀 어수선하다. 저우성츠 판 무협 액션 영화 같은 강호의 칼부림 장면은 욕망의 극적 충돌을 과장한 형식적 장치이긴 하나, 극 전체의 통일감으로 보자면 생뚱맞다.
앞서 쌓아온 의미와 긴장을 일거에 절단내버리는 이 키치적인 유희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대중적 감수성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는 안도감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동시대 관객과 세태에 투항해버린 결과인가. 근대연극의 언어 중심과 의미 축적의 ‘견딜 수 없는 무거움’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실행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작품이 가진 철학적 질문과 독창적인 발상이 몹시 아까운 것이다. 3월 4일까지, 대학로 낙산씨어터.
극작ㆍ평론가 장성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