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혁명' 이후 20년의 사상 변화를 점검하기 위해 계간 <황해문화> 가 청탁한 글의 맨마지막을 나는 별다른 내면적 부담 없이 '강한 중도'라는 입지 개념으로 마무리지었다. 황해문화>
그것은 우선 나의 학문적 결론이었지만 세기초를 살아가는 한 사회적 실존체로서 나의 정치적 양심을 표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설정한 화두이기도 했다.
● 21세기형 문제 못보는 진보 논쟁
우선 나는 앞으로 21세기를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조건을 확인하고 싶었다. 첫째, 좌든 우든, 남이든 북이든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진보든 보수든,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지향하는 국가적ㆍ사회적 이상은 궁극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나는 각종 위기 담론, 즉 경제 파탄, 민주주의 위기, 진보 위기 등의 실상과 참여정부의 위상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싶었다. 결론은 그런 말들에 절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난 20년간 이룬 경제성장, 민주화, 그리고 진보적 생활 분위기 등이 얼마인가? 그것들은 당장 정권이 넘어간다고 해서 봄날의 눈처럼 날아갈 것이 아니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얘기도 그것이 완전히 성공했다는 얘기만큼이나 상황 판단을 어지럽힌다.
현재의 참여정부는 2002년 대선과 2004년 탄핵 위기 때의 여망에 훨씬 못 미치는 '과소 정부'이기는 해도 1997년의 신한국당 정부만큼 완전히 체면 구긴 정부는 아니다.
그런데 위기나 실패의 과장 담론 모두의 치명적 약점은 위기나 실패보다 더욱 악성적이고 만성적인 '21세기형 문제들'을 제대로 살피는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대처해야 할 국가적, 사회적 난제들은 이미 산적해 있다. 양극화, 저출산ㆍ노령화, 교육ㆍ직업ㆍ부동산 획득과 공공복지체계 구축의 부진, 지구화의 도전, 나아가 주변 열강과 북한의 이기적 압박 등에 대한 대처가 늦으면 우리 국가와 사회 전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해체당할 수 있다.
이런 도전 앞에서 우리는 참여정부가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방면의 정책에서 왜 부진했던가를 눈여겨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볼 때 참여정부는 행정관리 정부로서 놀라울 정도의 '관료적 기능성'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부동산정책의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제외하고는 정부 기능이 정지될 정도의 정책 파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의 집권세력이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참여정부가 국민적 통합성을 달성할 정도의 '정치적 역동성'을 창출하는 데는 거의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활동 지평을 '지구화된 세계'로 잡고 그 안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와 나 개인의 성공을 도모해야 한다는 객관적 요구에 비추어볼 때 정말 땀나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리고 당연히 그 정치는, 대한민국 시민 개개인의 국제적 경쟁력과 자기실현을 위한 온갖 물질적 바탕과 정신적 훈련과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모든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 '잡탕 여당'이나 '집권 야당'이나
그리고 더욱 주시할 것은 참여정부가 갖다 쓴 정책들이 상당 부분 진보적이라기보다 보수적 성장우선주의나 국제경제기구의 신자유주의에서 빌려온 것들이라는 점이다.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면 이런 말초적 경제실용주의의 실패라고 봐야 하며, 복지예산 몇 푼 더 늘린 것은 사실상 면피용이다. 대통령은 조세개혁의 변죽만 올렸고 국가 성격이나 양극화의 해일을 바꿀 정도로 과감한 정책적 창의력이 없었다.
그래서 '강한' 중도다. 즉 진정 보수(保守)해야 할 '우리 대한민국'과 '국가시민'에 진보(進步)한 삶의 내용을 과감하게 채워 넣자는 것이다.
보수는 굳건하지 못하고 진보는 채 실현되지 못했다. 할 일을 못 찾은 '잡탕 여당'과 위기 타령은 하지만 무슨 비책이 있는지 아직도 아리송한 '집권 야당'에 정신 팔 때가 아닌 것이다.
홍윤기ㆍ동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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