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탈당은 어느덧 차기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전형적 징후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당적 정리'의사를 밝힘으로써 이 현상은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연달아 4번째다. 대선을 앞두고 집권당의 선거를 돕기 위해, 또는 선거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벌어진 탈당들이지만 그 때마다 양상은 조금 씩 달랐다.
1992년 노 대통령의 탈당은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한 결과였다. 야당 출신으로 민주화 이력과 문민 대통령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김 후보는 군인 출신 현직 대통령의 잔영을 지워버리기를 원했다.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대통령의 집권당 탈당은 역대 처음이었다. 그에 따라 당적 없는 대통령에 여당 없는 국회를 겪었던 것이 그 때 처음이었다. 선거 정국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번엔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의 차별화 전략에 따라 탈당을 강요 당했다. 후보 선출 과정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감정의 골이 깊었던 이 후보측은 당시 아들 비리와 한보 사태, 경제 위기 등으로 인기가 떨어져 있던 김 대통령과의 결별을 필요로 했다.
당 집회에서 김 대통령을 상징하던 '영삼 마스코트'를 이 후보 지지자들이 마구 때린 사건을 도화선으로 양측의 감정은 폭발했다. 이 후보측의 탈당 요구에 대해 김 대통령측도 "당의 도움은 없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선거 1개월 전이었다.
● 노대통령 탈당, 새로운 유형
두 경우가 치열한 권력 투쟁의 산물이었다고 한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은 정권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자구책에 가까웠다. 김 대통령의 세 아들이 모두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심이 폭발 상태로 치닫자 대국민 사과와 함께 탈당 카드를 썼다. 선거를 7개월 앞둔 시점에 정국 수습과 민심 무마, 국정 전념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위기 관리용이었다.
이에 비해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은 어느 경우와도 다른 새로운 유형에 속한다. 인기가 떨어진 상태의 대통령을 선거에서 배제하려는 당의 요구가 종전과 유사한 배경이긴 하다.
그러나 직접적 권력 쟁투의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아니라는 점, 또는 자신의 탈당으로 민심의 완화에 도움을 준다거나, 국정 운영을 위한 선택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구태여 내세우지도 않는 점 등이 전례들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탈당인가라는 질문이 따른다. 사실 노 대통령의 탈당은 지금 그리 절실한 카드도 아니다. 탈당으로 유발될 수 있는 정치적 부가가치는 매우 제한적으로, 그가 탈당으로 이루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즉 탈당의 파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노 대통령의 탈당은 스스로 밝힌 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쉽고, 실체에도 맞는 것 같다. 그는 당 지도부에 "당적 문제와 관련하여 당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국정에 전념 하겠다거나, 선거정치엔 거리를 두는 대통령이 되겠다거나 하는 언급은 전혀 없다.
열린우리당은 곧 당 간판을 내리고 민주당을 포함한 대통합을 추진 중인데, 자신의 탈당은 오로지 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 해도 될 탈당, 또는 하지 말아야 할 탈당임이 은연중 느껴진다.
열린우리당이 추진하는 통합은 과거 '낡은 정치'에서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치 곡예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이미 탈당한 의원들에게 배신 변절 기만 부도덕 등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통합에 보낼 평가 역시 같은 유의 비난일 수밖에 없다.
● 낡은 정치 돕겠다는 대통령
그러니 노 대통령의 탈당은 낡은 정치를 타파한다고 집권한 지 4년 만에 바로 그런 정치세계로 스스로 함몰된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탈당을 통해 돕고자 하는 당은 지금 변절과 기만의 작업에 몰두 중이다.
이를 촉진하고 지원하겠다는 선언을 공공연히 한 데서 집권의 약속과 도덕률이 간단하게 깨졌음이 확인된다. 수석 당원으로서 그는 대통령의 탈당 카드를 당원들에게 선사했다. 그나마 당에 대한 기여라며 흐뭇하고 흡족해 할지 모르지만 '국민의 대통령'에게서 느끼는 것은 좁은 계산과 배신감이다.
그는 자신의 탈당을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의 실패, 정략의 산물을 말할 뿐이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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