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을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로 선포합니다."이웃집 아저씨에게 성추행 당한 뒤 무참하게 살해된 초등생 허모(당시 11세)양을 기리는 1주기 추모제 및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 선포식이 허양의 모교인 서울 용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여성가족부와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주최하고 38개 시민단체가 함께 한 선포식은 화려했다. 요란한 음악소리에 종이 축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허양 부모의 표정은 어둡고 창백했다. "너를 잃기 전 그날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허양의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천장만 올려다봤다. 딸이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을 그 곳에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죽음을 막지 못한 아버지의 회한을 풀어냈다.
지난해 오늘 허양 사건에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정부와 각종 단체가 나서서 어린이 성폭력 관련 법안 제정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어린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랬듯 법안은 여전히 논의 중, 계류 중이다. 국가청소년위원회가 낸 청소년성보호법은 관련 부처들의 이견으로 표류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육 현장에서의 성폭력 예방 교육도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이번 선포식이 또 한번의'눈길끌기용 이벤트'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니냐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도 이처럼 늘 말만 앞세워 온 어른들의 전력(前歷) 때문이다.
선포식이 열린 그 시각. 딸을 7년 동안 성폭행하고 4번이나 임신중절시킨 파렴치한 의붓아버지가 구속됐다. 어른들이 말의 성찬을 늘어놓고 작은 문구로 입씨름을 하는 사이 어둠 속에서 성폭력에 짓밟히는 꽃 같은 아이들은 늘어만 간다.
"어른들이 좀더 서둘렀더라면 내 소중한 친구를 잃지 않았을 텐데…." 울먹이던 허양의 단짝친구 이하나(12세)양의 목소리가 행사장을 나선 뒤에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이현정 사회부 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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