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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수녀님과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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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수녀님과 된장

입력
2007.02.2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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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40대 여자 여섯이 모여 삶에 관한 넋두리를 담은 아담한 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그것을 기념하여 책을 만들어준 수녀님들이 정성스레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그동안 글을 통해 상상 속에서만 만났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보니, 물색없는 반가움 위로 어제 본 듯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원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동안 목소리로 정들었던 수녀님 모습은 왜 그리도 곱던지.

● 가슴 뭉클했던 선물들의 기억

실컷 수다를 떨고 난 다음 수녀님들이 손수 차린 저녁상으로 안내되어 가 보니, 곱게 썰어 색색으로 장식한 구절판에, 겨우내 땅 속 깊이 묻어둔 덕분인가 알맞게 익은 백김치에 아삭아삭한 총각무에, 연근볶음 단호박튀김 북어무침에, 된장시래기국까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웰빙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미자차 곁들인 후식까지 배불리 먹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눌 때가 되자 글쓴이들을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받고 보니 소담스런 항아리 가득 된장이 담겨 있었다.

"된장 선물 우습지요? 그래도 우리가 정성스레 담아 일년 동안 기도로 익힌(?) 거라우. 특별한 분들에게만 드리는 선물인 것 기억해 주세요." 다음날 저녁 밥상에 두부 호박 썰어 넣고 된장찌게를 끓여 올려놓았더니, 갓 돌 지난 조카손주 녀석까지 찌게에 밥 말아 입맛 다셔가며 맛나게 먹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오래도록 가슴 따스해오고 생각하면 왠지 뭉클해오는 그런 선물을 받은 기억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졸업식이 한창이고 줄줄이 입학식이 이어지는 계절이고 보니 집집마다 주인공들이 하나 둘은 있을 텐데, 축하의 마음을 정성스레 표현할 선물을 준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듯싶다.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선물 목록을 꺼내 보자니, 오래전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날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건네주셨던 분홍빛 만년필이 떠오른다. 당시로선 귀한 만년필이었기에 중학교 3년 내내 분홍빛 뚜껑이 벗겨져 회색빛으로 바랠 때까지 아껴 쓰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대학을 졸업하던 날 외할머님께서 몰래 손에 쥐어주시던 하얀 봉투도 생각난다. 그 봉투 속엔 "자랑스럽구나 손녀딸아, 열심히 노력하야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연필로 꾹꾹 눌러 쓰신 편지 한 장에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 서너 장이 들어 있었다. 지금도 대학졸업장 사이에 끼어 있는 외할머님 편지를 볼 때면 남달리 손녀를 위하시던 그 마음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다.

본래 선물이란 건 주고받음을 근간으로 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인 만큼 선물문화를 보유하지 않은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화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문화적 보편성과 다양성이 어우러진 우리네 선물문화에도 분명 주고받음의 격조와 품위가 있었을 텐데 그 자리를 천박한 허례와 속물적 허식으로 채워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물질 가는 곳에 마음 가는 것'이라 믿는 요즘 세대의 주장을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지만, 행여 마음은 뒷전이요 물질이 앞서는 건 아닌가 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하기야 주고받은 것이 많으면 헤어질 때 복잡하니 안주고 안받기를 생활화하자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데야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 선물문화의 진정성 뿌리내리길

소박한 정성이 화려한 포장에 눌릴수록 선물로 맺어지는 우리네 관계는 더욱 공허해지고, 가격표 따라 마음이 움직일수록 선물로 이어지는 우리네 관계 또한 더욱 척박해질 것만 같다.

사회 곳곳에서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묻혀버린 우리네 삶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즘, 주는 사람 마음 풍요로워지고 받는 사람 마음 뿌듯해오는 선물문화의 '진정성'이 다시금 평범한 일상 속에 자연스레 뿌리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온다.

함인희ㆍ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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