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에 안경'이란 속담은 맞는 말이다. 깨알 같은 주식시세표도 자신이 투자한 종목에 관한한 돌출광고처럼 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애지중지하는 사람의 허물은 등잔 밑이 어둡듯 좀처럼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관점과 사관이 중요하다.
일본군위안부 청문회가 얼마전 미국 하원에서 열렸다. 위안부 출신 할머니 세 분이 세계의 심장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한 것이다. 일본이 맹렬하게 저지운동을 벌인 데다 미국 정부까지 위안부 문제에 관련되는 것을 피해왔기에 더욱 값진 청문회였다. 그래서 쾌거로 불렸다.
하지만 기자는 뜨끔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을 뻔히 보고도 별 도움이 못됐다는 미안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별 의심도 없이 한국 대 일본이란 민족 대립구조로 편협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중요한, 다른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당혹감이 컸다.
민족이란 안경은 백인 위안부로 더 알려진 얀 러프 오헤른(84)이란 네덜란드인 할머니가 증언대에 선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 에 백인 위안부가 등장했던 부분이 어렴풋이 기억은 났어도 일본군 위안부하면 의례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여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루타>
사실 100명 정도였다는 네덜란드 위안부 등 백인 위안부는 10만명을 휠씬 넘었다는 전체 위안부와 비교하면 규모면에서 미미하다. 하지만 기자에겐 일본군위안부가 민족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종에 관계없이 인간이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인권과 존엄성을 짓밟은 범죄였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우쳐주는 계기가 됐다.
안경은 엉뚱하게도 청문회를 열성적으로 준비한 재미 동포들에 의해 또 한번 흔들렸다. 사실 기자는 지일(知日)파 의원들이 많은 의회에서 청문회가 쉽사리 열리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0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미국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데다 미국 연방항소법원도 2001년 아시아 피해 여성들이 제기한 집단소송을 관할권이 없는 외교적 문제라며 기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의회 차원의 일본군위안부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자는 움직임은 그동안 8번이나 있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면 청문회는 어떻게 열릴 수 있었을까. 김동석 뉴욕ㆍ뉴저지 한인유권센터 소장은 청문회를 미국 시민(재미동포) 대 일본 로비스트의 대립구도로 규정하고 서명운동을 편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대 일본의 충돌구도가 되면 미국 의원들이 동맹국의 싸움에 말려든다면 손사래를 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격앙되기 십상인 민족 문제를 미국의 상황에 맞게 재치있게 변형한 것이다.
요즘 탈(脫)민족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80, 90년대 문화계를 선도했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명칭에서 민족이란 말을 빼는 것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였다. 가수 박진영씨는"한류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일갈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5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국내에 거주하고, 농촌 총각 3분의 1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하는 지금, 배타적 맹목적 민족주의은 이제 다른 민족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을 발의한 민주당의 마이크 혼다 의원은 3월말까지 하원 전체회의에서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도록 총력전을 펼 계획이라고 한다. 행여 한국 정부나 정치권이 개입해 민족 대결구도로 개악하는 우는 없어야 겠다.
김경철 국제부장 k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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