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력·걱정 떨치고 '취업의 봄' 맞고 싶다"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 전체 실업자는 76만8,000명이다. 이 중 40대(13만4,000명) 50대(7만7,000명) 실업자는 21만1,000명(27.4%)이다. 40대와 50대를 일컫는 4050세대는 나라의 중심 축이자 가정의 기둥이다. 그러나 4050실업자들은 ‘고용의 사각지대’에서 홀대 받고 있다. 정부와 기업 등이 운영하는 전직(轉職) 지원 인프라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조기 퇴직했거나 사업에 실패한 뒤 일자리를 찾고 있는 40,50대 6명(가명 사용)이 한 자리에 모여 구직의 어려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했다. 이들은 21일 서울 여의도 하나증권 빌딩 5층 노사공동 재취업지원센터에서 구직 과정에서 겪은 설움과 좌절, 진지한 자기성찰, 정부 고용 정책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의 희망을 진솔하게 쏟아냈다.
●사연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 재취업
▲정찬수(48)=1996년부터 전자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다 지난해 초 접었다. 1년 동안 방황한 끝에 취업을 결심했다. 나이 들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배관ㆍ보일러공 같은 설비직을 하고 싶다.
▲김태연(42ㆍ여)=지난해 11월 말까지 제약회사에서 재무회계 총책임자를 맡다 그만뒀다. 은행 근무를 합치면 재무회계 쪽에서 18년 일했다. 중소기업이나 외국계 회사를 찾고 있다.
▲김진선(38ㆍ여)=대학 졸업 후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서 월급 사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초 매출 감소로 구조조정 당했다. 회사 나오기 전에는 퇴직 이후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 창업 여건도 안 돼 바리스타(커피 전문가) 쪽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다.
▲나선필(45)=대학 졸업 뒤 해운회사에 5년 다녔다. 수입가구 판매업과 당구장도 해 봤다. 저축은행에서 6년간 근무하다 2003년 9월 회사가 파산 나 함께 실직했다.
▲이형재(47)=대학 졸업반 때 처음 원서를 내 붙은 제약회사에서 15년간 영업 업무를 하다 지난 연말 명예퇴직 했다. 취직 보다는 창업 쪽을 생각하고 있다.
▲이종오(50)=직장에서 해외영업 8년 한 뒤 용산 전자상가에서 13년 동안 컴퓨터 외부기기를 팔았다. 인터넷 쇼핑몰의 저가 공세에 밀려 사업을 접고 스리랑카에서 중고 컴퓨터 장사를 했다. 처음엔 잘 됐지만 경쟁이 치열해져 못 버티고 두 달 전 한국에 돌아왔다. 취업하고 싶다.
●막노동판도 경력 있어야 하는 세상
▲정찬수=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회사 정리하니 남는 건 빚밖에 없었다. 아들은 고3, 딸은 중3이 된다. 아이들 다니는 학원을 줄일 순 있지만 끊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세차장, 음식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런 막일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선필=마찬가지다. 돈이 문제다. 실직한 지 얼마 안 돼 친구에게 빌려준 돈도 떼였다. 취업이고 뭐고 당장 먹고 사는 게 중요했다. 세차장, 막노동판을 기웃거렸다. 구인잡지 보고 다단계 회사에도 가 봤다. 생계가 불안한 마당에 정식 취업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한다는 건 꿈 같은 얘기였다.
▲이종오=대책 없이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지 두 달째다. 나 역시 아침에 눈 뜨면 걱정부터 앞선다. 오라는 데는 없고 무작정 길거리를 헤맬 수도 없고…. 몇 번 나가본 새벽 인력시장에서는 충격만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보다 덩치 작고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매일 봉고차 타고 일터로 가는데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허탕 치기 일쑤였다. 무심히 뜨는 아침 해는 왜 이리 야속한지….
▲이형재=퇴직금으로 버티고 있어 아직까지는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다. 그런데 자꾸만 무기력감이 든다. 자신감도 없어졌다. 인간 관계 유지하는 게 가장 힘들다. 명퇴했다고 말하면 동정의 눈빛으로 보는 게 싫고 부담스럽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진다. 요즘엔 집이 가장 편하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
▲김태연=퇴직하고 한 달은 재충전하며 편하게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불안하다. ‘65년 생에 그것도 여자’라는 두 가지 벽에 부딪혔다. 내가 가려는 재무회계 쪽은 특히 남자를 선호한다. 나이가 좀 어리면 과장급으로도 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내가 아니라 회사가 더 부담을 느낀다. 회사들은 따지는 것도 많다. 해외경험은 있느냐, 세무감사는 해 봤냐, 영어 말고 중국어도 잘 하는가 등등…. 몸무게(연봉)도 가볍게 하고 눈높이도 낮춰봤지만 여전히 현실은 냉혹하다.
▲김진선=커피숍 사장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전혀 퇴사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돈 모아 창업 해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 일자리를 못 찾고 있는 건 성격 탓도 크다. 소극적이다. 인터넷 뒤지는 게 전부다. 최근에야 인맥도 활용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정찬수=회사 망하고 1년 간 친척 등 아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부탁해 몇 번 면접을 봤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되겠다’는 말만 들었다. 그 동안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막상 몇 번 퇴짜를 맞으니 내가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도대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한 건지’ 하는 회의도 많이 했다.
▲나선필=재취업센터에 나온 건 큰 결단이었다. 막노동 해서 벌 수 있는 일당을 포기하고 왔기 때문이다. 저축은행 두 곳에 지원해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일하고 싶고 업무도 자신 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좋은 소식도 왔으면 좋겠다.
▲이형재=다른 분들이 부럽다. 아직도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창업을 하려는데 업종도 못 정했다. 막연한 상태에서 꿈만 꾼다. 제약 영업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바보처럼 살았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 미리 회사 다닐 때 준비하지 않았나 후회 된다.
●우린 인생의 낙오자 아니다
▲이종오=길어진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살아 온 날보다 살 날이 많다. 재취업센터를 찾은 건 자신감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다. 고약한 심보일지 몰라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하는 위안과 함께 자신감을 찾는다. 우린 인생의 낙오자가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
▲정찬수=경륜 있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취업 컨설턴트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젊은 컨설턴트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다양한 연령층의 구직자들을 상대하려면 40,50대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컨설턴트도 필요하다.
▲이형재=일자리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만드는 거다. 그래도 정부에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40대 실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부실하다. 모의면접 같은 것은 젊은이들에게나 필요하다. 우리에겐 별 쓸모가 없다. 구직-구인자를 정확히 연결해 줄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내 능력과 경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이 나라에 한 곳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선필=정부가 운영하는 취업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40대를 위한 코너는 어디에도 없더라. 서운했다. 재취업 정보는 많은데 창업 정보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다양한 구직자의 구미를 맞추는 정책이 필요하다.
▲김태연=일자리를 찾겠다고 혼자서 낑낑대면 더 힘들고 지친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 대화하고 정보를 나누다 보면 힘도 생기고 약해졌던 자신감도 다시 얻는다. 그런 점에서 재취업센터 같은 곳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
▲김진선=돈이 있어 창업을 하지 않는 한 다른 직장에 가면 소모품으로 쓰이다 용도폐기 돼 또 다시 지금 같은 신세가 될 게 뻔하다. 시간이 좀 들더라도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 1,2년 노력해 앞으로 20년 이상 보장 받을 수 있는 평생직업을 찾는 게 더 경제적이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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