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수색권도 계좌추적권도 없는 공정거래위원회지만 최근 증거 찾기가 가장 어렵다는 카르텔(담합) 사건을 속속 적발하며 업계에 과징금 공포증을 확산시키고 있다.
공정위 조사관들은 카르텔 혐의 업체를 방문할 때 한가지 의무사항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가장 먼저 카르텔 혐의 사실을 자백하면 과징금과 검찰 고발을 면제 받을 수 있는 '자진신고 감면제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혐의를 부인하던 업체들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가담 업체 모두 끝까지 공정위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공정위는 담합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되고, 담합 사실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업체라도 자백 하면 나머지 업체들은 엄청난 액수의 과징금을 물어야 하고 형사처벌까지 받는다. '먼저 자백해서 면제를 받는 게 어떨까.' 담합에 가담한 업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담합의 바탕이 된 '신뢰'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공정위가 합성수지 제조업체의 담합 혐의를 적발, 20일 1,0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었던 것도 게임이론 중 하나인 '죄수의 딜레마'를 이용한 결과다. 호남석유화학은 공정위의 제안에 응해 업계 담합을 증명할 자료를 제출하고 과징금과 검찰 고발을 면제 받았다.
역대 담합 사건에서 과징금 액수 6위 안에 든 사건 중 4건이 이처럼 관련 업계의 자진신고로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합성수지 사건을 비롯, 시내전화사업자 담합건, 굴삭기 제조사 담합건, 밀가루 제조사 담합건 등이다.
미국에서 적발된 경우지만 지난해 반도체 가격 담합 혐의로 임원이 징역형까지 선고받아 충격을 준 삼성전자 사건의 경우, 국제적 담합에 참여했던 마이크론이 처벌 면제를 조건으로 자진신고를 하면서 가격 담합 사실이 드러났다.
자진신고 감면 제도가 국내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97년. 처음에는 적용 사례가 미미했지만 2004년 9월 최초 자진 신고자에게 의무적으로 과징금을 완전 면제토록 하는 규정이 도입되면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99년~2004년 자진신고에 의해 적발된 가격 담합 사건은 한해 1, 2건 정도에 불과했지만, 2005년과 지난해 각각 7건 씩으로 대폭 늘어났다.
정재찬 공정위 카르텔조사단장은 "공모자의 자진신고로 가격담합이 적발된 경우 '배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관련시장에서 다시는 그런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진신고 감면제도에 대한 업계의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호남석유화학은 시장점유율 1위 업체로 담합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 역시 가장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조사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범죄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법적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특히 모든 형사사건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유죄 인정 조건부 처벌감면 제도)가 정착한 미국 등과 달리, 국내에는 가격담합 사건 외에는 감면 제도가 없다는 점도 형평성 논란의 원인이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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