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문학인이 되길…” 그 한마디 줄곧 날 쫓아온다
Dear 금주
다시금 하루를 깨끗이 묻어버려야 할 시간이다. 모든 것이 고요해진 공간 속에서 나 혼자만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 난 그래서 이 밤을 좋아하는지 모르지. 너무나 오랜 침묵의 시간들이 우리 사이에 많은 것을 쌓아놓고 간 것 같다. 사실, 그 동안의 나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싶진 않다. 충격에 쇼크에 충격의 연속이었던 시간들. 이제는 돌아보고픈 마음도 아무 것도 없다. 허물어져 내리는 나를 구축하기에 온 전심을 다할 테니까.
금주야. 그 동안 극심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것 같은 혼란에서 편지를 쓰고 생각도 해 보고 다른 것들도 여러 가지 시도해 보았다. 지금은 아무런 대상도 없이 서 있는 것 같아서 한없이 외롭다. 네가 원한다면 말해줄 수도 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나의 지나친 처신이기도 했다.
오늘 정오경 전화 걸었을 때 방방 튕기는 듯한 네 목소리가 새로웠다. 물론 안 달라질 수야 없겠지만 음색 빼놓고 많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토끼와 흡사했음). 금주야. 중학시대에서 청탁이 와서 ‘첫사랑의 수기’(거기서 남학생 이야기는 거짓말이야)를 보냈다. 네게 너무 늦게 말한 셈이 되지만 이런 용기는 지금에야 가질 수밖에 없게 됐구나. 그리고 네 글, 최우수상 수상한 것 정식으로 축하한다. 아울러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문학인이 되길.
1981. 7 혜정
혜정에게
지금 26년 전 그대가 보내준 4통의 편지를 책상 위에 가만히 올려놓으며 눈을 감는다. 순간 세상의 샛길 어딘가에 숨어있던 우리의 그 많던 대화들이 꽃들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모습을 본다.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그대의 정성스런 필체를 본다.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단 한 번의 안부전화도,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다. 하지만 시를 향한 그 처음의 자리에서 언제나 마주하고 있음을 안다. 두 사람에게 중학교 시절부터 시는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문학인이 되길”이라고 조숙한 편지를 건네준 그대. 내 꿈을 엿본 그 한 마디가 줄곧 나를 좇아오고 있다.
세월은 거듭 얼굴을 달리하며 나를 고통과 슬픔의 격랑으로 몰고 갔다.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삶을 눈물로 바치고 있다는 걸 그대는 모르지 않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는 시와 평론과 학문의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그대가 건네준 첫 시집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 , 그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글자’라는 시가 참 좋다고 말했더니 빙긋이 눈으로 웃으며 가만히 있던 그대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세상 사는 날까지 그대 작품의 오랜 독자이고 싶다. 그대는 내가 첫눈에 알아 본 시인이었고, 불혹을 넘긴 내 생애 전무후무한 가장 빛나는 지기(知己)이니. 비>
2007년 2월 금주
■ 김다은의 우체통
소중한 편지… 26년만의 답장
여중생 허혜정의 편지에 26년 만에 쓴 허금주씨의 답장. 시인의 떡잎, 여중생 혜정은 다른 편지에서 “우리 모든 처사에 대해서 씁쓸해 하지 말자”라고 읊조리고 있어 그 조숙함이 혀를 차게 한다. 이제 두 허씨는 될성부른 시인들이 되었다. 이번 이삿짐을 싸면서 금주는 혜정의 편지들을 잃어버릴까 조심했다고.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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