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찾아오는 설 연휴 기간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텔레비전 보기가 아닌가 싶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의 사용이 일상화된 지금도 전 국민의 대표적 여가활동은 여전히 텔레비전 시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설이든 추석이든 명절만 되면 텔레비전은 나름대로 온갖 종류의 뷔페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의 시선을 붙잡기에 바쁘다. 이름하여'특집'프로그램들이다.
그 스펙트럼을 일별해 보면 지상파 텔레비전의 시사교양, 연예오락 장르에 속하는 프로그램부터 케이블 텔레비전의 외화시리즈까지 특집의 종류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명절 특집'드라마가 있으며,'설 연휴 특선'영화가 있고,'설 특집'다큐멘터리도 있다.
심지어 각 방송사를 대표하는 개그맨들이 타사 코미디 프로그램의 인기 꼭지에 서로 역할을 바꿔 출연하는 등 강고한 기존 텔레비전 텍스트의 경계를 손쉽게 무너뜨리며 보란 듯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구현하는 실험적인 특집프로그램도 있다. 케이블 TV의 경우에는 22시간 연속 방영되는'설 특집 미국 드라마'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특별히 편성되는 프로그램들은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평소엔 쉽사리 접할 수 없다는, 즉 상시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내용면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번 설 연휴기간에 편성된 지상파 방송의 특집 프로그램들은 예전의 상투성과 전형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설'특선' 영화는 심야시간대를 완벽하게 장악해 버렸는데, 과연 이러한 편성이 시청자들의 편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인지 의문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연휴기간 내내 매일 밤 방영되는 대여섯 편의 영화 중에서 마음만 먹으면 한두 편 정도는 골라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명절 때마다 영화전문 케이블 채널도 아니고 지상파 방송에서, 스스로 아젠다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기획하고 제작한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그것도 대부분 '대중영화'만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문제다.
최근 흥행작 몇 편, 대표적 블록버스터 몇 편, 싸게 틀 수 있는 영화 몇 편 하는 식의 손쉬운 계산법에 기초한 매우 안이한 편성의 결과가 아닌지 묻고 싶다. 영화 팬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렇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되지 않는 천편일률적 취향의 편성은 영화문화의 발전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창의성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정도가 더 심하다. 예를 들면 SBS특집 <뉴 엑스맨 스타 배틀> 은 그동안 방영되었던 스타 배틀 중 인기를 끌었던 장면들만을 골라 단순히 편집해 만든 프로그램으로서, 심하게 말해 되새김질 이외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뉴>
프로그램을 통째로 재방송하지 않고 그나마 시간과 공을 들여 재가공했으니 예쁘게 봐달라는 것인지. 이외에도'빅 스타'란 이름으로 연예인과 아나운서들을 한데 묶어 개그맨들과 대결시키는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장기자랑에 한바탕 어지러운 춤판을 벌이는'명절형'프로그램 포맷은 이번에도 굳건한 생명력을 보이며 살아 남았다.
과연 언제나 되어야 이렇게 상투성에 매몰된 프로그램 포맷을 벗어날 수 있을지 답답할 따름이다. 그나마 지상파 방송의 이번 설 특집 프로그램 중 참신한 기획으로 새로운 프로그램 지형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으로는 단연 다큐멘터리를 꼽을 수 있다.
자연 다큐와 휴먼 다큐가 균형있게 잘 어우러질 수 있는'텔레비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가족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명절특집에 잘 어울리는 속성을 갖고 있기에 기대는 더욱 크다.
물론 다큐멘터리 외에도 지상파 방송은 새로운 프로그램 형식과 주제를 개발해 내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야 한다. 이 시대 대중문화, 영상문화가 주로 텔레비전에 의해 매개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영화 이외의 다른 문화예술 프로그램들도 방송사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특집으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한국사회에서 점차 인기가 높아 가는 뮤지컬 전반을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와인 문화에 대해 출판만화 못지않게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해를 맞아 텔레비전이 기존의 문화현실을 단순히 매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판을 형성해가는 창의적 이니셔티브를 쥐기를 기대해본다.
김영찬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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