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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앞에만 서면… 펜은 왜 작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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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앞에만 서면… 펜은 왜 작아지는가

입력
2007.02.1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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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총리는 재임 중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나라”(2000년 5월 15일)라고 주장했다. 당시 엄청난 비판과 파문을 초래했지만, 천황에 대한 일본인의 실제적 정서를 함축한 표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정신적 지주 이상의 존재인 천황에 대해 일본에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금기가 많았다. 천황과 황실의 문장(紋章)인 국화의 이름을 따 ‘기쿠(菊)터부(Taboo)’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이다. 천황에 대한 부정론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일종의 사회적 압력이다.

기쿠터부 중에는 특히 언론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금기가 많다. 폭력과 테러를 앞세운 우익에 의해 주도돼 왔다. 일본 사회가 보수ㆍ우경화하면 할수록 기쿠터부와 관련된 사건이 빈발하는 등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척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이를 입증한다.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는 16일 황태자 가족과 황실에 대해 쓴 책 ‘프린세스 마사코’의 일본어판 출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도쿄 특파원을 역임한 호주 언론인 벤 힐즈씨가 쓴 이 책은 황태자비인 마사코의 황실 생활을 다루고 있다. 일본정부는 이 책에 대해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저자와 출판사에 사과와 내용 수정을 요구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고단샤의 출판 중단초치는 이 같은 상황에서 나왔다. 고단샤의 “더 이상 저자와 신뢰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힐씨는 “출판중지는 대단히 유감”이라며 “고단샤는 궁내청과 외무성 등 관료조직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에는 천황을 풍자한 연극이 우익의 압력에 의해 공연을 중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풍자극단 ‘다곤무요’(他言無用)는 한 주간잡지가 주최한 행사에서 이 연극을 공연했는데, 다른 주간지가 연극 내용이 ‘불경’(不敬)하다고 비판하자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결국 극단은 “황실을 경애하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불쾌감을 드렸습니다. 앞으로 황실을 촌극으로 패러디하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하겠습니다”라는 사죄문을 발표한 뒤에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전전(戰前) 일본에서는 천황을 비판할 경우 ‘불경죄’로 형사처벌 할 수 있었다. 패전 후 언론의 자유가 확산되면서 이 같은 금기가 사라지는 듯 했지만 보수ㆍ우경화의 흐름을 타고 기쿠터부는 수시로 요동쳤다.

1960년의 주오코론(中央公論) 사건은 잠잠하던 기쿠터부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이 잡지 12월호에 황태자비가 민중에 의해 살해당하는 부분 등이 묘사된 소설 ‘풍류몽담’(風流夢譚)이 게재되자 우익단체가 ‘불경’한 소설이라며 들고 일어섰다. 급기야 우익단체에 소속된 소년이 다음 해 잡지사 사장 집에 침입해 가정부를 살해하고 사장의 부인에 중상을 입히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일본 언론들이 천황에 대한 자율규제를 관례화하는 태도를 취하게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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