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법원에 좋은 판사가 있다. 그의 재판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 한없는 거짓말도 미소 지으며 끝까지 듣는다. 그의 방에는 탁자까지 기록들이 수북하다. 그런데도 그는 위조해서 제출한 변호사의 증거까지 찾아냈다.
그는 구도자이기도 했다. 강추위가 닥친 겨울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은퇴한 철학자의 강연장 구석 철제 의자에앉아있는 그 판사 부부를 봤다.
부인 역시 수정같이 맑고 투명한 여자 같았다. 고위직인 판사 부부는 아직도 전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노숙자시설 주방에 몰래 가서 김치라도 담가주려고 계획하는 걸 우연히 안 적도 있다.
● 살아 움직이는 흉기 될 수도
고위직 법관들은 남을 경계하고 꺼렸다. 그런데도 그의 행동에는 걸림이 없다. 법원 기사를 사양하고 직접 차를 몰았다. 지나가는 길에 아는 변호사를 보면 태워주기도 한다.
권위의식이 전혀 없다. 그가 명판관이 된 배경은 남이 모르는 뼈아픈 경험이었다. 그는 20대에 사기범으로 고소되고 지명수배자였다. 붙잡혀서 검사실 철제 의자에서 조사도 받았다. 변호사에게 큰 돈도 내 보았다.
재판을 할 때면 그런 경험들이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실력도 탄탄하다. 그가 쓴 지침서가 전 법관의 교과서가 될 정도다. 그는 행동하는 법의 전도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에 같은 고위직이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법관도 있다. 법정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선입견이 꽉 차 있는 걸 느낀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승승장구해온 판사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
당사자의 절규는 과감히 깔아뭉갠다. 이미 머리 속에 꽉 찬 오만과 독선 속으로 다른 게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죄인 뿐 아니라 변호사들의 인격도 깔아뭉갰다. 한 중년의 변호사가 담당한 피고인에게 "변호사가 쓰는 것보다 당신이 직접 항소이유서를 쓰는 게 훨씬 나을 뻔했어"라고 내뱉는걸 보기도 했다.
방청을 하던 젊은 학생까지도 참 졸렬한 재판장이라고 뒤에서 욕했다. 빈 수레는 요란하다. 그 판사는 인터넷을 통해 변호사는 범죄자의 대리인일 뿐이며 우리 판사들과는 다르다고 후배들에게 선포했다.
그걸 보면서 변호사의 새로운 사명에 뒤늦게 눈떴다. 변호사는 국민과 한 몸이 되어 교만한 법관의 권위의식과 싸우는 투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법조인의 자질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석궁을 맞은 판사도 있고 뇌물을 받은 판사도 있다. 거짓말을 강요하다 곤혹을 치르는 판사 출신 검사도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딸아이가 한 모임에서 총각판사들 얘기를 듣고 와서 분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화제는 연수원의 성적 자랑이었고 딸에 대한 질문은 "너희 아버지 돈 잘 버시니?" "대법원에 아는 분이 계시니?"라는 거였다.
여자와 석 달 이상 사귀지 않는다는 걸 공공연하게 내뱉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젊은 판사님들은 아버지가 돈 없는 변호사라고 하니까 무시하는 눈빛이 완연하더라고 했다. 나는 서울법원의 법대 위에 지금도 앉아있는 그 젊은 판사님들을 이따금 보면서 그들이 과연 죄인을 인간으로 봐줄까 걱정스러웠다.
● 법치 기본은 판사의 인격과 양심
그런 출세주의 판사들이 앞으로 살아 움직이는 흉기가 될 수 있다. 그들의 눈이 대법원을 향할 때 한 사람의 인생은 순간적인 단순 업무에 불과할 수도 있다.
법을 해석하는 데도 영혼이 있어야 한다. 그건 법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형식논리만으로 국민의 절규를 무시하면 다음에는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다.
이해와 철학이 담겨있는 개인적 특성을 가진 판결문이 없다. 규격화된 문서들만 있다. 훌륭한 판사들이 명예롭게 일하는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법치주의는 법전이 아니라 판사의 인격과 양심에 있기 때문이다.
엄상익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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