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석(42) ㈜마그넷포유 대표는 ‘마그넷’(magnetㆍ자석 혹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인물)이다. 대학 중퇴, 아버지의 사업실패, 이혼 등 내세울 만한 경력은 없다. 오로지 20년 가까이 걸어온 ‘자석 외길’만이 그의 유일한 자부심이다. 자석 하나로 세계를 끌어당기는 윤 대표의 인생 4막을 들어봤다.
#1막(1985년)-나이트클럽 웨이터의 호출
불량 인생이었다. 공부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돈은 모으고 싶었다. 온갖 자서전을 섭렵한 그는 “대기업을 일군 기업가 치고 공부 잘한 사람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인하공대 금속공학과(84학번)를 1년 만에 때려 치고 가출한 뒤 강남의 유명 나이트클럽에서 살다시피 했다.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무대에서 춤 실력을 뽐내고 있는데 웨이터가 불렀다. “윤봉석씨 호출입니다.”나를 점 찍은 아가씨일까 하는 생각에 달려가보니 ‘아뿔싸’ 아버지와 삼촌이 서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옷은 찢어지고 기억도 희미했다.
유일한 피난처는 군대였다. 제대(1988년) 후에는 사업을 해보겠노라고 아버지에게 손을 벌렸다. 옷 장사 명목으로 받은 1억원은 1년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업 초기엔 말끔한 외모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다. 얘기도 꺼내기 전에 “당신 말고 사장 데려오라”며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그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돌파했다. 그는 “젊은 날에 놀았던 경험과 순식간의 실패를 통해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하는 법과 아이디어만이 힘이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2막(1990년)-부친이 남긴 불량 자석
아버지(윤기성ㆍ71)가 사업에 실패했다. LG금속(현 LS-NIKKO) 상무이사를 하다 설립한 특수자석회사(일성통상)가 1년 만에 망하자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임직원은 속속 떠나고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풍비박산난 가정은 삼형제 중 장남인 천덕꾸러기 봉석씨의 몫이 됐다.
남은 건 불량 판정을 받은 전자부품용 자석 2억원 어치. “금형(金型)이라도 있으면 뭔가 해볼 텐데 500만원을 어디서 구하나.” 판로를 찾아 동분서주했지만 카드 빚 1,000만원 때문에 결국 신용불량자가 됐다. 아내도 떠나고 아이의 양육권도 포기해야 했다. 동대문시장을 떠돌다 좌판 옆에 주저 앉았다. 곱게 깎아 반지르르한 단추더미가 봉석씨를 불렀다. “바보, 녹이지 말고 깎으면 돼.”구원의 메시지였다.
이후 오피스텔은 공장이 되고 주차장은 창고가 됐다. 자는 시간을 빼곤 자석깎기에 몰두했다. 자석 위에 본드를 바르고 단추용 고광택 플라스틱을 덧씌웠다. 그는 “본드질의 달인이 됐다”고 웃었다.
불량 자석은 알록달록 단추 옷을 입고 ‘메모 고정용 자석 홀더’란 기발한 발명품으로 환골탈태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는 “당시 월 매출이 5,000만원을 넘었으니 단추 덕분에 아버지 빚을 갚고 불량 자석 덕택에 불량 인생이 기회를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3막(1992~97년)-자석은 화수분, 바이어는 스승
자석 홀더 성공 이후 그는 17년간 자석에 딱 달라 붙어 있다. 92년 코리아마그네틱(마그넷포유 전신)을 세우고 본드질의 달인답게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색종이와 고무를 붙인 ‘홍보용 컬러 고무자석 스티커(자석 전단지)’를 발명했다. 떼는 게 고역이라 홍보는커녕 욕먹기 십상이던 종이 스티커의 단점을 해결한 대박 상품이었다.
자석 스티커는 100만개가 팔렸다. 자석 액자, 자석 수첩, 자석 다트, 자석 블록, 자석 가베(학습용 나무토막 완구) 등 자석으로 만든 문구와 완구는 모두 윤 대표의 머리에서 상품 개발로 이어졌다. 그의 자석 애찬론은 끝이 없다. “자석은 밀고 당기는 성질 때문에 누구나 흥미를 느끼는 물건이다. 자석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다.”
윤 대표는 “바이어는 하나님, 제품은 천국의 열쇠”라고 말한다. 자석 스티커를 개발했을 때 일화다. 대선이 한창이던 92년 말 모 정당 관계자가 자석 스티커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종이보단 잘 붙지 않을 것 같다”는 의문을 제기하자 윤 대표는 자석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시속 200㎞로 달렸다. 윤 대표는 “바이어의 의견을 존중하고 제품으로 승부해 3억원 어치를 납품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매일 5명 이상의 바이어를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경청해서 얻은 자료와 정보를 잠들기 전에 메모해 둔 아이디어 노트만 수십 권이 넘는다. 그는 “사업가는 바이어가 전하는 추상적인 얘기를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 뿐이다. 바이어의 말 속에 답이 있다”고 확신한다.
#4막(1997~2007년)-수출만이 살길이다
그라고 외환위기를 비껴갈 순 없었다. 내수 100억원을 일궜던 회사지만 거래업체가 잇달아 무너져 30억원의 부도를 맞고 휘청거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각오로 98년 초 독일과 홍콩 문구전시회에 자석 다트를 선보였지만 단 한 건의 계약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답은 바이어와 해외 소비자가 줬다. 국내에선 통하던 원색과 캐릭터 디자인을 버리고 야구 다트, 골프 다트 등 해외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을 개발했다. 새 자석 다트는 6개월 뒤 미국 완구 유통업체에 100만 달러 어치를 납품하는 실적을 올렸다. 2003년엔 ‘500만불 수출탑’을 받으면서 알짜배기 수출기업으로 거듭났다.
성공은 국내로도 이어졌다. 자석 다트는 모방제품이 봇물을 이룰 만큼 불티나게 팔렸다. 2002년 외국에서 먼저 출시된 자석 블록 ‘맥스막(Max Mag)’은 국내에서 2005년 홈쇼핑과 할인마트를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우수 디자인상품으로 선정됐다. 2005년에는 구슬자석게임이 산업자원부 지정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그의 집무실 벽은 특허와 실용신안등록증 40여개와 각종 상장으로 채워져 있다. “자석 완구를 만들다 보니 교육사업에 눈을 뜨게 됐어요. 완구만 파는 게 아니라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는 거죠. 교육완구 시장을 독점하는 레고 같은 거대기업의 아성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 마그넷포유는 어떤 회사/ 자석 블록·다트… 美·유럽서 대박
㈜마그넷포유는 겉과 속이 다르다. 경기 용인시 모현면에 자리잡은 공장은 조립식 가건물 2개 동이 전부다. 평범하다 못해 차가운 깡통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곳에서 한해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아기자기한 자석 완구를 만들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신천지가 펼쳐졌다. 이쑤시개 크기의 자석막대와 자석구슬(자석 블록) 수만개로 만든 파리의 에펠탑,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런던 다리 등이 회사 안 곳곳에 설치돼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각양각색의 블록 자동차와 건물, 동물을 비롯해 침 화살을 대체한 자석 화살 다트, 자석 스티커 등이 화려하게 손짓하는 전시룸을 둘러보면 갖고 싶은 욕망이 들썩인다.
윤봉석 대표는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힘은 회사의 외형이 아니라 제품의 질”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표의 지론처럼 직원이 고작 40여명에 불과한 마그넷포유는 자석 문구와 완구 제품에 있어선 글로벌 벤처 기업이다.
구구절절 회사를 설명하는 것보다 마그넷포유가 출시한 제품을 소개하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자석 수첩,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스티커, 쇠침 대신 자석을 이용한 자석 다트, 자석 블록 등 한번쯤 사용했을 법한 자석 관련 제품이 모두 마그넷포유의 히트 상품이다.
해외 시장 역시 마그넷포유의 진가를 인정하고 있다. 자석 다트는 미국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려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자석 블록 ‘맥스막’은 2002년 해외시장에 먼저 선을 보였다. 이후 모터를 달아 배틀 게임이 가능토록 한 ‘액션막’ 등 5가지 버전을 개발했다.
최근에는 유럽시장을 겨냥해 막대가 휘는 ‘웨이브막’까지 내놓았다. 특히 지난해에는 창의력 학습용 나무토막 완구인 ‘가베’에 회전자석을 넣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붙이기가 가능한 ‘자석 가베’를 개발, 완구업계를 놀라게 했다.
교육완구 시장에도 정식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해 9월 경기 분당에 ‘맥스막에듀센터’를 열고 외국인 교수 등 국내외 연구진에 의뢰해 맥스막과 자석 가베를 교구로 하는 지능개발 교재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방문교육 시장공략에 들어갔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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