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1호 터널을 빠져 나와 삼일로로 접어들면 바로 오른쪽에 하얀 화강암으로 지어진 영락교회가 서 있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삼일로 고가도로가 사라진 후 부쩍 눈에 잘 띄게 됐다.
그 담 옆에 키가 10m는 넘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재작년 가을 노랗게 물든 잎을 보고서야 닥나무임을 알아차렸다. 세상에 이렇게 큰 닥나무가 있다니. 그 날 이후 삼일로를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그 쪽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관상용으로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닥나무여서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지 걱정스러워서다.
■ 고향의 양지바른 언덕배기나 밭둑에 서 있던 닥나무는 아무리 키가 커도 2~3m가 고작이었다. 관목으로 타고나서가 아니다. 서울 도로변의 쥐똥나무는 어른 허리께 정도로 잘려 있지만 산에서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쥐똥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관목 중에서도 수십 년 동안 가만히 두면 영락교회의 닥나무처럼 제법 늠름하게 자랄 나무가 있다. 농촌의 닥나무는 그런 팔자가 아니었다. 매년 늦가을이면 밑동에서부터 싹둑 잘리는 운명이었다. 한지 재료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다른 요긴한 쓰임새도 많았기 때문이다.
■ 살짝 말린 닥나무 가지를 가마솥에 둥글게 말아 넣고 찐 후 뜨거운 껍질을 통째로 벗겨 넓적하게 펴서 말렸다. 적당한 굵기로 찢어 물에 축인 닥 껍질은 곧바로 질기고 부드러운 끈이 되었고, 가늘게 찢은 닥 껍질을 꼬아 쓰면 더욱 질겼다.
나일론 끈이 나오기 전이고, 가죽 끈을 구경하기란 더 어려웠으니 이보다 나은 끈이 없었다. 특히 아이들의 팽이치기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다. 닥 껍질로 만든 채찍은 팽이에 착착 감겼다가 풀리면서 무섭게 팽이를 잡아 돌렸다.
다만 귀한 닥 껍질을 아이들 놀이에 낭비할 수 없어서 대개는 뽕나무 껍질로 대용했다. 어쩌다가 닥 껍질을 얻으면 여러 겹으로 접어 주머니에 간직했다.
■ 고향의 닥나무들도 지금은 키가 많이 컸다. 농가에서 닥 껍질을 쓸 일이 거의 없어졌다. 주머니칼로 나무토막을 깎아 팽이를 만들고, 팽이에 박을 쇠구슬을 얻으려고 자전거포 주위를 얼쩡거리고, 어른들 눈을 피해 닥나무를 자르거나 껍질을 벗겨가는 아이들도 없다.
설 명절을 맞아 놀이공원이나 민속마을에서 팽이치기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잠시 TV에 비치긴 했지만 다른 민속놀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용일 뿐이다. 밭에 그늘이 진다고 웃자란 닥나무를 잘라낼 사람들마저 없어져 감나무만한 닥나무를 보게 될 날이 멀지 않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