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글·홍성찬 그림 / 창비 발행·52쪽·9,800원
‘여우가 나온 골짜기’란 이름의 마을에 설을 맞아 일가 친척들이 모여든다. 이름하여 여우난골족(族).
부모님을 따라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 합류한다.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베를 기막히게 짜는 신리 고모 가족, “살빛이 거무스레하고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열여섯에 홀아비 후처로 시집간 토산 고모 가족, “말끝에 서럽게 눈물 짤 때가 많은” 큰 골 과부 고모 가족,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고… 먼 섬에 밴댕이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작은 아버지 가족.
여우난골족으로 그득한 할아버지댁 안방은 새 옷과 떡 내음새로 가득하고, 저녁 숟가락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옆 배나무 동산에 모여 숨바꼭질이랑 장가놀이 하느라 밤이 어둡도록 떠들썩하다. 아랫방에선 어머니들이 못다한 얘기를 수런거리고, 윗간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 히히덕대다 잠이 든다.
피붙이들의 설 모임을 구수하게 풀어낸 백석의 대표시 ‘여우난골족’이 원로 화가 홍성찬의 기품 있고 따뜻한 그림과 어우러져 한 권의 책에 묶였다.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역사의 산증인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는 화가다.
우리의 옛 모습과 정서를 가장 잘 그린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평안도 사투리가 감칠맛 나는 백석의 원시를 형상화하고자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평안도 사람들이 옮겨 살고 있는 연변 산골 마을에서 직접 설을 ?丙?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실향민들을 인터뷰해서 채웠다. 여든을 한 해 앞둔 노작가의 열정 앞에 숙연해질 뿐이다. 이런 철저한 고증 덕분에 그림 속 일가족은 옷매무새 하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됐고, 백석의 시 또한 특유의 생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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