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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의사당 울린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우린 아직도 저주스런 악몽에 시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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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의사당 울린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우린 아직도 저주스런 악몽에 시달린다"

입력
2007.02.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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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차라리 지옥이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군대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었던 할머니들은 15일(현지시간)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과 분노를 터뜨리며 손으로 가슴을 쳤다.

미 하원 레이번빌딩에서 열린 청문회장에는 한국과 일본, 호주 미국 등의 취재진과 참관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아직도 저주스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증인으로 나선 네덜란드 국적의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한 평생 치욕을 안고 살아왔다”며 때론 손으로 책상을 치기도 하고, 때론 고개를 마구 가로 저으며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올해 85세로 호주에 살고 있는 오헤른 할머니는 백인 위안부라는 사실 때문인 듯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오헤른 할머니는 “우리에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저주스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는 과거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아름답고 큰 집에서 요리와 정원일, 빨래를 해주는 시종과 운전사 등을 두고 살 정도로 넉넉하고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9세 처녀였던 1942년 3월 일본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침략하면서 꿈 많고 아름다웠던 오헤른의 미래와 행복한 인생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오헤른 할머니는 “일본군은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일본군 수용소에 억류한 뒤 17세 이상의 젊은 여자들을 종군위안부로 강제로 끌고 갔다”고 말했다.

이후 오헤른 할머니는 3년 반 동안 수용소에서 강간과 폭행, 굶주림 등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이하의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할머니는 “일본은 1995년 아시아위안부재단을 만들어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에 나섰지만 이것은 위안부 여성에 대한 모욕이었고 그래서 거절했다”며 “그들은 전쟁 당시 잔학행위를 시인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일본의 맹성을 촉구했다.

“성폭행 거부에 전기쇼크 등 고문과 학대”

첫 증인으로 나선 이용수 할머니는 설움이 북받치는 듯 “제가 겪은 일들을 꼭 얘기해야 하는데 너무 부끄럽다”며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유모로 일하는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면사공장에 다니다가 16세이던 1944년 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고 밝혔다.

이 할머니는 “대만에 도착해 2층으로 된 일본풍의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강간으로 순결을 빼앗겼다”며 “이후 성폭행을 거부하는 자신을 일본군들은 전기 쇼크 등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학대했다”며 치를 떨었다.

당시 위안소는 방이 20개쯤 있었고, 도주하려다 잡혀 온갖 폭행을 당했으며 잡곡과 쌀죽으로 연명하며 생명을 이어왔다고도 밝혔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 중 한명이 자신에게 ‘도시코’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 이후 자신은 위안소에서 ‘도시코’란 이름으로 통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이 끌려간 장소가 대만의 신주라는 사실도 잠자리를 같이한 일본군이 뇌까리는 말을 듣고 알게 됐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들은 개돼지보다도 더 추악했고, 한국말을 하면 폭행 당하기 일쑤였다”며 몸서리를 쳤다. 이 할머니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며 “세계 성폭력 만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노리개 되어서도 죽지 않을 만큼 맞아”

열 여섯 살 때 군대위안부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돼야 했던 김군자 할머니는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땅까지 오게 됐다”며 “돈으로 망가진 내 인생을 보상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

김 할머니는 “그 때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으며, 내 몸에는 너무나 많은 흉터들이 남아있다”며 “일본 정부는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김 할머니는 “도착 첫날 저항하다 맞아 왼쪽 고막이 터졌고, 하루에도 수 십 명을 상대해야 하는 고통을 참지 못해 도망치다 호되게 폭행 당했다”며 “3년 동안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으나 죽지 못해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해방되어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했던 남자와 재회했지만 상대 집안의 반대 속에 남자가 자살했고, 당시 임신해 낳았던 딸은 5개월 만에 숨지면서 김 할머니는 이제껏 혼자 살아왔다고 말했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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