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멋·속도 1석3조 떡국 아세요
어린시절, 설날이 다가오면 무언지 모를 설렘에 밤잠을 설쳤다. 엄마가 평소 잘 사주시지 않던 때 늦은 코트며, 신발가지 등 나의 호사를 누릴 수 있던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일까?
색동 저고리와 치마 같은 전통 설빔은 아니었지만, 설날은 나에게 너무나 고마운 명절이었다.(한복이 아니어서 더 고마운 명절이 아니었을까….)
아주 어렸을 적 엄마는 딸 셋을 등에 양팔에 거둬가며 터미널로 힘겹게 나가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고, 나는 가는 내내 울음과 멀미를 번갈아 해대 엄마 속을 끓였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지나 우리 집에도 자동차라는 것이 생겼고, 설을 쇠러 서울로 가는 길은 김밥과 간식, 그리고 음료수를 한아름 싣고 내달리는 딸들의 즐거운 소풍길 같았다.
새벽녘부터 가족을 위해 열심히 김밥을 만 엄마와 장시간 운전하는 아빠의 수고가 이제야 마음에 닿아 가슴 한 켠이 저려온다. 어찌 됐든, 지금의 귀경길이 내가 말하는 추억의 소풍길만 같겠는가. 그 때만하더라도 울산에서 서울까지 밀려 밀려 올라와도 8시간 안에는 도착하는 초고속 주행(?)이었으니, 나의 추억이 사뭇 사치일 수도 있겠다.
설렘으로 가득 찬 귀경길이 끝나면 할머니 댁 마루에서는 큰 아빠, 작은 아빠 그리고 울 아빠가 간단히 수정과를 마시며 회포를 푼다. 큰엄마, 작은 엄마, 그리고 울 엄마는 벌써부터 부엌에 들어가 갖가지 음식들의 밑재료 손질을 후딱 끝내 놓으시고는 바로 전투에 들어가신다.
큰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전이며 산적들을 부쳐내는 손아래 동서들은 분주하고, 간간히 할머니에게 감수를 받아가며 명절음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서 우리 세 딸들과 사촌들은 자연스레 안방으로 들어가 자체 놀이방을 만들며 엄마들의 수고를 덜어준다.
고소한 기름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가 방안으로 새어 들어와 요동을 치면 우리는 까치새끼 마냥 입 벌리고 엄마 옆으로 가서는 한두 개씩 얻어먹는 맛에 고 주변만 맴돌곤 했다.
지친 하루가 끝나고 설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어른들은 제사준비에 한창이다. 이른 아침 제사가 끝나자마자 엄마들은 제대에서 물린 음식들로 상다리가 휘도록 한상 그득 반찬을 차려내고 떡국을 끓여 올리신다.
한꺼번에 끓이다 보니 간혹 퍼져있는 떡이 있는데, 그 정도의 떡은 당연히 감내를 하고 먹곤 했다. 점심나절 찾아온 고모네 덕에 또 다시 같은 상에 떡국, 저녁에는 갖가지 나물을 넣어 헛제삿밥을 만들어 먹으면 어느덧 명절이 가버린다.
물론 요즘에는 조금 더 현명해져 각자 만들 음식들을 만들어 와 설을 지낸다고 한다. 우리 엄마부터 신시대적 발상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확실히 현명하고 시간 절약적이며 전략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다. 거기에 더해 우리 시어머니의 방법은 더 신세대적이고 고전략적인 방법이었으니 이름하여 조립식 맑은 떡국이다.
뭐, 이 이름은 나 나름대로 붙인 것이라 너무 상투적이기는 하나 그 방법론으로 따지자면 이것을 따라올 떡국은 없을 것이다. 일단 상식적인 떡국은 양지머리와 여러 가지 야채를 넣어 육수를 만들고 찬물에 살짝 불린 떡을 육수 안에 넣어 한소끔 끓여 소금과 후추 등으로 간을 한 뒤 계란지단, 소고기 볶음, 버섯볶음 등을 고명으로 얹어 그릇에 담아 낸다.
오늘 소개하는 맑은 떡국은 육수를 끓이는 방법이야 동일하지만 그 다음은 말 그대로 조립식이다. 일단 한쪽 냄비에 물을 끓이고 시금치, 당근, 버섯 등 데쳐낼 수 있는 야채를 데쳐내어 식힌다.
그리고 나서 먹을 분량의 떡을 넣어 살짝 데쳐내고 그릇에 떡, 야채고명, 육수를 부어 내기만 하면 된다. 이 요리법의 장점은 고명을 따로 채 썰어 지져내거나 볶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남은 떡을 재활용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또 시간차별로 들이닥치는 친지들에게 스피디하면서도 모양새 있게 떡국을 낼 수 있다는 데에도 있다. 떡은 먹을 만큼만 데쳐내고, 남으면 찬물에 헹궈 더운 기운을 빼 냉장고에 보관한다.
다시 쓸 때는 끓는 물에 2~3초간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다시 막 데쳐낸 떡처럼 된다. 고명으로 쓰이는 야채들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데쳐내어 냉장 보관해 놓고 고명으로 얹는다. 육수는 냄비 한가득 끓여 필요할 때마다 주전자에 넣고 끓여 그릇에 붓기만 하면 된다.
맑은 떡국은 방법적으로도 훌륭하지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그 맛에 있다. 우리의 상투적인 떡국은 재료가 한데 섞여 끓여 내다보니 어우러지는 맛이 있는 반면 국물이 탁해지면서 질척한 형태로 약간의 점도가 생기게 된다. 또 뜨거운 육수로 인해 먹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떡이 퍼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시어머니의 떡국은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살아있으면서 육수가 모든 재료를 어우르게 하는 맛이 있다. 게다가 국물은 맑아 정갈한 느낌을 주면서 고명의 기름진 성분이 없어 개운하고 뒷맛이 깔끔함을 느낄 수 있다. 그??육수가 조립된 재료들에 침투하면서 먹기 좋은 온도로 변하고 떡의 퍼짐 현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무나 현명한 시어머니의 떡국 덕분에 정신 없던 나의 설 명절은 한결 가벼워졌다.
여기에 보너스 시어머니 명절음식 하나를 더 보태자면, 이것은 떡국에 비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특이한 모양새 덕분에 칭찬 받는 명절요리 2호가 된 떡갈비를 소개한다. 통상적으로 썰어진 가래떡을 구입해 떡국을 끓이는 집이라면 말랑말랑한 가래떡을 추가로 구입해야하는 약간의 경제적 부담도 감안해 주시라.
일단 명절음식 여기저기 들어가는 소고기 다짐육을 1근정도 남겨두고 불고기 양념을 하여 재워둔다. 여기에 손가락 길이만큼 자른 말랑한 가래떡에 양념갈비를 얇게 붙이고서는 후라이팬에 한번, 석쇠에 한번 구워낸다.
모양새는 마치 갈비뼈가 붙은 갈비와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둘러싸인 고기는 한결 씹기에 편안하다. 거기에 떡의 쫄깃하면서 담백한 맛이 고기와 어우러져 한층 고급스러운 맛을 뿜어낸다. 손님상에 낼 때는 차례대로 조로록 담아 잣가루를 뿌려내면 한층 고급스러우면서도 고풍스러운 담음새로 변신하게 된다.
요리사와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가는 우리부부에게는 색다른 조리법과 담음새는 익숙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성공률에 대한 부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요리든 약간의 조리법과 담음새를 달리한다면 어떤 주부이건 부엌에 있는 시간이 더 효과적이면서 즐거울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명절에는 우리부부가 제안하는 설음식의 재해석으로 더 현명하고 센스 있는 주부가 되면서, 가족들의 보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을 제공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김상영 푸드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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