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제1야당 신민당을 이끌던 이철승씨의 중도통합론이 당 안팎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드센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중도'가 유신 파시즘의 안보 논리에 맥없이 포섭됐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안보 캠페인이 시민적 자유와 빚어내는 긴장을 모른 체함으로써, '참여 하의 개혁'을 내세운 이철승씨의 '중도'는 그 제창자의 파시즘 협력을 그럴싸하게 치장하는 흰소리가 되고 말았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중도'라는 말이 화사하게 복권되고 있다.
문단 명망가들 입에서, 대학과 언론사 둘레의 논평가들 입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야 정치인들 입에서 '중도'는 시대정신의 열쇠어로 추앙되고 있다. 이 중도는 이철승씨의 중도보다 더 좋은 중도일까?
● 정치판 복음처럼 추앙되는데
중도는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지양하고자 하는 대립물의 차이가 벌어져 있을수록 뜻이 크다. 명도(明度)를 잣대로 삼은 '검정과 하양 사이의 중도'라든가, 색상환(色相環)의 자리를 기준으로 삼은 '초록과 빨강 사이의 중도' 같은 것 말이다. 실상 이런 맥락의 중도는 인류사회의 윤리적 정치적 이상을 함축한다.
평등지상주의와 자유지상주의 사이의 중도, 민족허무주의와 민족지상주의 사이의 중도, 무정부주의와 경찰국가 사이의 중도, 성장제일주의와 분배제일주의 사이의 중도 따위가 그 예다. 이런 중도는, 극단주의자들의 '선명노선'보다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한 공동체의 쏠림을 막아 균형을 잡아주는 '덕(德)의 길'이라 할 만하다.
요즘 한국 정치의 복음으로 선양되는 중도는 이런 중도가 아니다. 그것은 흔히 '친북좌파'라고 (터무니없이) 비판받는 집권세력과 '수구반동'이라고 (대체로 정당하게) 비판받는 주류야당 사이의 중도를 가리킨다.
이런 중도도 선양할 만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중도가 제창된 배경은 이해할 수 있다. 집권세력과 주류야당의 싸움이 워낙 격렬하다는 점 말이다. 주고받는 말들의 데시벨과 비속함만 놓고 보면, 이들은 이념적 대척에 서있는 불구대천 원수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훨씬 많은 이념적 동료들이다. 집권세력과 주류야당은 이 나라를 이끄는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 2002년에 한나라당이 집권했다 해도, 노 정권 이상으로 미국과 총자본에 고분고분할 수는 없었을 게다.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몇몇 지점에서 집권세력과 주류야당이 태도를 달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 두 세력의 동질성을 해칠 만한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노 대통령 자신이 대연정 제안을 비롯한 수많은 계기에서 주류야당과의 동질성을 시인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리 격렬하게 싸우는가? 그 싸움에 밥그릇이, 권력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자본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싸움은 격렬하지만 차이는 잗다랗다. 이런 잗다란 차이를 지닌 노선 사이의 중도란 도대체 뭘까?
● 똑같은 패거리들의 밥그릇 싸움
나는 청와대 사람들과 과점언론 사이의 중도가 어디인지 짚을 수 없다. 그들은 같은 길을 걷는, 다른 패거리(가 아니라면 '패밀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 조기숙씨와 전여옥씨 사이의 중도가 어디인지도 짚을 수 없다.
그들은 저잣거리언어의 격렬함으로 각자의 '패밀리'에 대한 충성심을 뽐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이름을 나란히 놓은 것이 어느 쪽에 더 결례인지는 모르겠으나, 행태만이 아니라 이념에서도 이들은 쌍둥이 자매다.
노 정권과 주류야당(과 과점언론)은 같은 길을 경쟁적으로 내닫는, 사이 나쁜 쌍둥이일 뿐이다. 이들 사이의 중도란, 다시 색상환을 끌어오자면, 고작 파랑과 남색 사이의 중도일 테다.
이런 중도에도 뜻이 있을까? 지금 근육을 움찔거리는 중도는 민낯(요즘 말로 '쌩얼') 우익노선과 화장한 우익노선 사이의 중도다. 이들의 싸움이 소란스럽다 해서 이런 동질적 분파 사이의 중도에 '균형 한국'의 미래를 걸 수는 없다. 이름값을 하는 중도는 이 치우친 중도보다 훨씬 왼쪽으로 뻗어있을 게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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