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나 사회가 두 언어를 쓰는 상태(2개 언어 병용)를 영어로는 바일링구얼리즘(bilingualism) 또는 다이글로시아(diglossia)라고 한다. 앞쪽 말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고 뒤쪽 말은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둘 다 어원적으로 ‘두 개의 혀’라는 뜻이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한 자연언어만을 쓰는 정치공동체는 언어생태계에 매우 드물다. 한국이 그 드문 예다. 한 정치공동체 안에 수십, 수백 개 언어를 품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회는 둘 이상의 혀를 지녔고,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흔히 둘 이상의 혀를 지녔다.
바일링구얼리즘은 한 개인의 언어구사 능력이나 습관을 주로 가리키고 다이글로시아는 한 사회의 언어 분포에 초점을 맞춘다는 뉘앙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두 낱말은 개인과 사회에 두루 쓸 수 있는 말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2개 언어를 쓰고 있으면 그는, 또는 그 사회는 바일링구얼리즘이나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다.
그러나 사회언어학자들은 이 두 낱말을 구분해서 쓴다. 바일링구얼리즘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두 개 언어를 쓰고, 그 두 언어가 사회적 기능에서 차별적이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예컨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플랑드르어)가 둘 다 통용되고, 시민들 상당수가 이 두 언어를 병용한다. 그리고 이 두 언어가 기능적 차이를 거의 지니지 않는다. 이 때, 브뤼셀이라는 도시는 바일링구얼리즘 상태에 있고, 두 언어를 병용하는 시민 개개인도 바일링구얼리즘 상태에 있다.
반면에 다이글로시아는 한 개인이나 사회가 두 개 언어를 쓰되, 그 두 언어가 사회적 기능에서 차별적인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두 언어를 쓰는 장소나 상황이 서로 다른 경우를 가리킨다.
한 정치공동체는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자연어 사용
그 두 언어가 동일한 위상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어
영어를 못하는 美이민자가 공민권 행사 힘들 듯
비주류언어의 차별은 사용하는 구성원에도 차별적
예컨대 캘리포니아의 코리아타운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영어로 교육을 받고 영어로 공적 활동을 하지만, 이웃끼리 파티를 열거나 모여서 화투를 칠 때는 한국어를 쓸 것이다. 여기서 한국어의 기능은 영어의 기능과 다르다. 이 때, 캘리포니아의 코리아타운은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고, 코리아타운의 한국계 미국인들 개개인도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다.
근대 초기까지의 유럽이나 19세기까지의 한국 지식인 사회에는 라틴어와 민족어, 고전중국어(한문)와 한국어가 사회적 기능을 달리한 채 병존하고 있었다. 유럽 지식인들이 말은 제 민족어로 하면서도 글은 라틴어로 썼듯, 한국 지식인들도 말은 한국어로 하면서 글은 한문으로 썼다. 그러니, 그 시절 유럽이나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었고, 라틴어를 알았던 유럽 지식인이나 한문을 알았던 한국 지식인 개개인들도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었다 할 수 있다.
한국은 다이글로시아·바일링구얼리즘 없는 단일어 사회
하지만 서울말과 사투리 사이에서는 엄연한 위상 차이
한 문장·담화 안에 두 언어를 섞어쓰는 코드스위칭은
화자의 욕망과 관련 있지만 분명 언어민주주의에 기여
한 사회가 바일링구얼리즘 상태에 있을 땐, 다시 말해 그 사회에서 쓰는 두 언어의 지위나 기능이 비슷할 땐, 한 개인이 꼭 바일링구얼(bilingual: 이언어 사용자)이 될 필요는 없다. 그는 두 언어 가운데 한 언어만 알아도 별다른 불이익을 겪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브뤼셀 시민이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 한 가지만 알아도,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은 없다. 동료시민들 상당수가 두 언어를 동시에 알고 있으니 의사 소통이 안 될 염려도 없고, 도로표지판에서부터 관청 공문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적 커뮤니케이션이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함께 이뤄지므로 공민권을 행사하는 데 불편을 겪을 염려도 없다.
그러나 한 사회가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을 땐, 그 사회의 구성원 개인이 다이글롯(diglot: 이언어 사용자)이 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 예컨대 영어를 모르는 캘리포니아의 한국계 미국인은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에서든 공민권 행사에서든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다이글로시아 사회에서도 그 주류 언어 배경을 지닌 사람은 꼭 다이글롯이 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영어를 제1언어로 쓰는 캘리포니아 사람이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꼭 익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페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제1언어로 쓰는 캘리포니아 사람은 영어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
보통 이언어 사회라고 부르는 언어공동체는 대부분 (바일링구얼리즘이 아니라)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놓여있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거의 대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거의 동일한 기능을 수璿求?브뤼셀은 바일링구얼리즘의 아주 희귀한 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이언어 사회에서 두 언어의 존재 양태가 비대칭적이라는 뜻이다.
근대 이후 많은 다이글로시아 사회에서 영어는 주류 언어 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정작 영어의 고향 잉글랜드에서 영어가 비주류 언어 구실을 한 시절이 있었다. 1066년의 노르만 정복(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때부터 적어도 너덧 세기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공존하는 다이글로시아 사회였다. 거기서 주류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그 시절 잉글랜드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지배계급의 표지였다.
바일링구얼리즘이든 다이글로시아든, 이언어 병용은 벨기에의 브뤼셀이나 캘리포니아의 한국계 미국인 사회처럼 비교적 좁은 지역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국가 단위로 범위를 넓히면, 한 공동체 안에서 셋 이상의 언어가 쓰이는 경우가 훨씬 흔하다. 이 다언어 사용의 양태도, 사용되는 언어들의 힘이나 기능이 엇비슷한 멀틸링구얼리즘(multilingualism)과, 힘이나 기능이 차이나는 폴리글로시아(polyglossia)로 나눌 수 있다. 이언어 사회 대부분이 (바일링구얼리즘이 아니라)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놓여있듯, 다언어 사회 대부분도 (멀틸링구얼리즘이 아니라) 폴리글로시아 상태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그 공동체에서 쓰이는 언어들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다. 예컨대 싱가포르는 베이징어(보통화), 영어, 광둥어, 말레이어 등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폴리글로시아 사회인데, 언어 사닥다리의 맨 위에 있는 것은 베이징어와 영어다.
앞에서 적었듯, 한국은 전형적인 다이글로시아나 바일링구얼리즘을 찾기 어려운 단일 언어 사회다. 그러나 한국에 다이글로시아(나 폴리글로시아) 현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주 노동자 사회가 다이글로시아(나 폴리글로시아) 상태에 있다. 예컨대 필리핀 출신 노동자들이 일하는 작업장은 타갈로그어와 영어가 한국어와 공존하는 폴리글로시아이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 존재하는 언어 사다리의 맨 위에는 한국어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 한국어의 방언 화자들 다수는 자신의 방언과 표준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다이글로시아를 만들어낸다.
다수의 사회언어학자들은 개별 언어들의 병용만이 아니라 동일언어의 변종들 곧 방언의 병용을 가리킬 때도 다이글로시아라는 말을 쓴다. 예컨대 스위스의 일부 도시에서는 표준독일어와 스위스독일어가 다이글로시아를 이루고 있고, 대부분의 아랍 나라에서는 고전아랍어와 현지 아랍어가 다이글로시아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다이글로시아라는 말을 느슨하게 쓸 경우에, 한국에도 다이글로시아가 또렷이 존재한다.
서울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지방 출신 서울 거주자들은 고향 친구를 만난 자리에선 자신의 방언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 서울말과 화자의 방언은 다이글로시아를 이룬다. 이 두 방언 가운데 더 고급의 변종으로 간주되는 것은 서울말이다.
다이글로시아라는 개념은 이언어 사용자가 특정한 장소나 상황(사회언어학자들은 이를 ‘도메인domain'이라 부른다)에 특정한 언어(방언)를 할당한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모로코계 프랑스인은 가족끼리는 아랍어를 쓰고 학교나 직장에서는 프랑스어를 쓴다는 가정 말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확률적인 것일 뿐 기계적으로 엄격한 것은 아니다. 가족끼리 프랑스어를 쓰는 모로코계 프랑스인이나 고향 친구들끼리 영어를 쓰는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다이글로시아에서 언어를 가르는 도메인은 느슨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 어떤 관점에서는, 매우 섬세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얼핏 보기엔 동일한 도메인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화자의 매우 미묘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면 말이다.) 이와는 다른 수준에서, 이언어 사용자들이 흔히 실천하는 코드스위칭(code-switching) 또는 코드믹싱(code-mixing)도 도메인의 구획을 흐릿하게 만든다.
코드스위칭이란 이언어 사용자가 한 문장 또는 한 담화 안에서 자신의 모어와 외국어(외래어가 아니라)를 섞어 쓰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의 한국계 미국인이 술집에서 누군가와 싸우다가 “You filthy scum이야! Get out of here! 당장!”(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 꺼져! 당장!)이라 말했다 치자. 여기서 한국어 ‘이야!’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이거나 영어 be 동사의 대치어라 볼 수 있고, ‘당장!’은 ‘right now!’를 한국어로 대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코드스위칭은 외국어에 서툰 화자만이 아니라 그 외국어를 모어처럼 익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 (2006)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뒤섞는 재일 한국인 가족이 그 예다. 지방 출신의 한국어 화자가 표준어와 제 방언을 한 문장이나 담?안에서 뒤섞는 것도 코드스위칭이라 할 수 있다. 디어>
이런 코드스위칭이 왜, 언제 일어나는가, 그것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다른 언어(방언)를 통한 대치나 부연에는 엄밀한 규칙이 있는가 따위의 문제는 사회언어학자만이 아니라 심리언어학자, 언어교육학자, 문법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직 제출되지 않았다.
확인된 사실은, 이런 코드스위칭이 이중정체성(dual identity)을 드러내려는 화자의 욕망과 관련이 있고, 이언어 화자는 자신처럼 이중정체성을 지닌 이언어 화자와 얘기할 때 코드스위칭을 실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정도다. 코드스위칭은 다이글로시아 상태의 이언어 화자가 도메인에 언어를 분배하는 방식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코드스위칭은 다이글로시아를 전제로 한 언어 실천이면서, 그와 동시에 다이글로시아 내부의 언어 위계를 교란하는 언어 실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규범을 깨뜨리고 불순함을 옹호함으로써 언어민주주의에 기여한다. 코드스위칭은 영어를 비롯한 주류 언어에 비주류 언어를 섞음으로써 주류 언어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표준어에 방언을 섞음으로써 표준어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다시 말해 주류 언어와 표준어의 식민주의적 위세와 욕망을 조롱한다. 그 광경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슬프기 십상이나, 이 광경의 아름다움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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