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치 부라흔(들어가게 해주세요).”
6일 오전9시(한국시각 오후2시) 아제르바이잔 서부 도시 예볼라 보건소 앞. 굳게 닫힌 정문 앞에서 수 백 명이 ‘난민카드’와 번호표를 들고 아우성이다. 환자가 너무 많아 이날 진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저마다 절박함을 호소했다. 1992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 당시 집과 가족을 잃고 홀로 난민생활을 해온 지아다(74) 할머니는 “15년 동안 한번도 진료를 받지 못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꼭 의사를 봐야 한다”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의료봉사단(단장 김종진 교수)이 난민 치료를 위해 전날 이곳에 차린 임시진료소는 발 디딤 틈이 없었다. 봉사단은 내과, 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한방과의 의사와 간호사, 학생 등 45명으로 꾸려졌다. 행사를 후원한 한화그룹 자원봉사단 5명도 참여했다.
접경 지역인 예볼라에는 지아다 할머니 같은 난민이 1만2,000명 정도 있다. 난민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종교ㆍ영토 분쟁 때문에 발생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의 아제르인이 기독교도인 다수 아르메니아인을 지배하는 구조가 다툼의 원인이다. 94년 휴전 협정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아제르 영토 일부를 차지했고 아제르인들은 집과 땅을 잃은 채 난민이 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진료실 10곳 모두 붐볐지만 내과 진료실에 특히 환자가 몰렸다. 정호연 교수는 “생활은 고달프지만 기름지고 짠 음식 문화 탓에 비만과 고혈압 환자가 적지 않다” 며 “소화 불량, 갑상선 이상 등 내부 기관이 모두 부실한 환자도 여럿이다”고 했다.
잘못된 의학 상식과 자가 진단도 증상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멀쩡한데도 신장이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정형외과 이재훈 교수는 “교통사고로 고관절을 다쳐 수술을 했어야 하는데 ‘그냥 두면 좋아진다’는 현지 의사 말만 믿고 내버려둬 상태가 심각해진 환자도 있다”고 말했다.
3시간은 기다려야 하지만 의료진의 친절과 정성이 입소문 나면서 진료소는 더욱 북적댔다. 전날 진료 받은 친구에게 ‘꼭 가보라’는 말을 듣고 왔다는 글데세(32)씨는 “침을 맞는 게 겁났지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 믿고 따랐더니 너무 시원하다”며 ‘촉 사올’(감사하다)’을 외쳤다. 엘미라(52)씨는 “귀찮은 기색 없이 늘 웃어주는 간호사들이 너무 예쁘다”며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고 했다.
오후5시께 소아과 진료실로 의료진이 몰려들었다. 선천성 방광 기형으로 고통 받는 아자드(4) 때문이다. 심계식 교수는 “1년 전 방광 수술을 했다는데 소변이 새는 등 상태가 좋지 않다”며 “한국에 데려가 수술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민호(의대 본과 3)씨는 “의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 태어날 때부터 아픈 어린이가 많다”며 “앞 못 보는 형과 말 못하는 동생을 데리고 온 부모의 근심가득한 눈이 어른거린다”고 말했다.
이날 진료는 예정 시간을 두 시간 넘긴 오후9시에야 끝났다. 이날만 600여명이 다녀갔다. 진료봉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설영돈 행정팀장은 “가발라 지역에서 1,000명 그리고 이곳에서 2,000명 등 1주일 동안 3,000명이 진료 받았다”고 말했다.
봉사단은 ‘민간 외교 사절’ 역할도 톡톡히 했다. 아제르바이잔외국어대 한국어과 조미현 교수는 “한국을 전혀 몰랐던 환자도 진료 받고서는 ‘촉 사올 코리아’를 외쳤다”며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볼라ㆍ가발라(아제르바이잔)=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김종진 의료봉사단장 "양국 친선 다리 놓은 것 같아"
“한국과 아제르바이잔 두 나라가 더욱 가까워지는데 작은 다리 역할을 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아제르바이잔 의료봉사단을 이끈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심장혈관센터장 김종진(52) 교수는 “아제르바이잔의 의료시설과 진료수준이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며 “특히 뇌 질환, 빈혈 등 어린이들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심장병과 선천성 기형 어린이 환자 4명을 한국에서 치료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과 시기를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평소 의료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던 난민들에게 도움을 준 것에 특히 보람을 느낀다”며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도 감사의 인사와 함께 더 많은 교류가 이뤄지길 바란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실제 아제르바이잔 부총리는 김 교수에게 “동서신의학 병원을 정식 시민단체(NGO)로 등록하고 사무실도 만들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 선진 의료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아제르바이잔 의대생들을 한국에 보내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김 교수는 “의료봉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 10시간 이상 진료봉사에 매달린 봉사단원과 행사 진행을 맡은 한국-아제르바이잔 문화교류협회(SEBA) 관계자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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