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주일우의 과학@영화.com] <7> 좁은 세상을 묶는 끈 - 펄프픽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주일우의 과학@영화.com] <7> 좁은 세상을 묶는 끈 - 펄프픽션

입력
2007.02.12 23:39
0 0

이미자 “결혼할래” 사내왈 “돌았나”/ 여자가 싸우려면 가발(假髮)을 쓰라/ [안녕하셔요] 「스타」 윤정희(尹靜姬)/ 이미자(李美子)와 소녀가수(歌手) 5각(角) 편지/ 미스ㆍ대원(大元)보일러 박순영(朴順英)양-5분데이트/ 사돈간의 사랑 때문에 - Q여사에게 물어보세요/ 누가 좋아서 삥땅을 하나/ 생존한 대원군 맏며느리 李씨마마/ 술집 아가씨로 오해받는 선생님들/ 재산관리법 덕분에 어린이 재벌 탄생/ 이뽑자「키스」했다 신세망친 치과의사/ 미스ㆍ강원도청(江原道廳) 한명희(韓明熙)양-5분데이트…

오래 전, 세상을 풍미했던 한 성인용 대중잡지의 목차를 나열해 본 것이다. 잡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건도, 사고도 많다. 기사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사건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대략 꼽아보아도 수십 명에 이른다. 이미자/이지환/김창수/조애희/윤정희/정은숙/여이주/문주란/박순영/이성/박청신/지학순/이계준/노락당 이씨/이은/이준용/하인 니콜라스/한명희.

영화 <펄프픽션> (쿠엔티 타란티노 감독ㆍ1994)에 등장하는 사건들도 이 대중잡지의 경우처럼 다양하고 등장인물도 많다. <펄프픽션> 의 사건들을 잡지 목차처럼 펼쳐 놓으면 다음과 같다.

깡패들의 난투, 사라진 금가방/ 권투경기 중 선수 사망/ 약물 중독으로 신음하던 여인을 살린 사나이/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얼치기에게 봉변 당한 깡패 두목/ 권총 오발사고/ 용기 있는 사나이 인터뷰: 풋내기 강도들을 훈계한 사연. 언뜻 보기에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들을 나열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등장 인물들의 관계 때문에 촘촘하게 엮여있다. 사건들의 중심에는 깡패 두목 마르셀러스가 있다.

마르셀러스는 자신의 금가방을 찾기 위해 빈센트와 쥴스를 시켜 가방을 빼돌린 건달들을 쫓았고 그 과정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권투경기에 나선 부치는 조작으로 돈을 따 보려는 마르셀러스의 청탁으로 상대에게 져 주었어야 했는데, 자기가 이기는데 몰래 돈을 걸고 상대를 몰아치다 죽여 버린다.

마르셀러스의 아내 미아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빈센트는 식당에 동행했다가 약물 중독으로 위독했던 미아를 구했고 돈을 챙겨 도망간 부치는 아파트에서 잠복하던 마르셀러스의 부하들과 난투를 벌이다 살인을 했다.

마르셀러스와 부치가 우연히 마주쳐 싸움을 하다가 변태인 얼치기 골목 깡패들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했다. 권총 오발사고는 빈센트와 쥴스가 차 안에서 옥신각신하다 우연히 발생했던 것이고 그 사고 뒤에 식당에 들렀던 쥴스는 거기서 마주친 풋내기 강도들을 제압하고 훈계를 해 돌려 보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성인용 대중잡지에 실린 사건들을 <펄프픽션> 의 사건들처럼 묶어 볼 수는 없을까. 더 나아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과학은 최근에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들의 집합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들 중에서 복잡계의 연결을 보여주는 ‘네트워크 과학’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결과들을 내 놓았고 전통적으로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이 아니었던 사회네트워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더해 주었다. 네트워크 과학을 이용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연결해 가다 보면 <펄프픽션> 의 이야기들처럼 촘촘히 얽힌 끈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분명히 현대 물리학의 한 분야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지만 ‘네트워크 과학’의 방법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복잡계의 구성요소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점과 선으로 단순화시켜 그림을 그려가면서 연구를 한다. 예를 들어, <펄프픽션> 의 등장인물들을 점으로 놓고 그들 사이의 인맥을 선으로 연결하면 일종의 사회 네트워크를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시스템을 점과 선으로 단순화시켜 연결해 놓았더니 놀라울 정도로 거의 똑같은 그림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을 통해 유용한 시사점들을 건질 수 있었다.

지구의 인구가 60억 명을 넘어섰는데 아는 사람을 이어 5명만 거치면 모두 연결된다고 한다. 이것을 처음 실험으로 입증한 사람은 하버드 대학의 스탠리 밀그램. 그는 40년 전에 300통의 편지를 미국 중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고 동부의 한 마을, 샤론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샤론에 사는 사람을 제일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편지를 전달했는데 평균 5.5 명을 거쳐 목적지에 도달했다. 21세기 시작과 더불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이메일을 전달하는 실험에서 이를 주관하고 있는 컬럼비아대의 던컨 와츠는 중간집계를 통해 밀그램의 실험과 비슷한 값을 얻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생각보다 좁고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세상이 좁다는 것을 밝힌 것만으로는 ‘네트워크 이론’을 과학이라 부르기에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연결이 어떤 모양인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얻는 것이 더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의 관계는 바둑판 모양으로 묶여있지는 않다고 한다. 바둑판 모양이라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만 연결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먼 곳의 사람과도 알고 지낸다. 그렇다고 그 연결이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아는 사람의 숫자가 다르기 마련이라 어떤 사람에게 연결된 사람의 수는 아주 많고 어떤 사람은 연결된 선이 몇 개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모양은 모든 도시가 비슷한 숫자의 고속도로에 연결되어 있는 모양보다는 몇 개의 공항에 노선이 집중되어 있는 항공노선의 모양과 비슷하다. 그리고 사회 네트워크 이외의 대부분의 다른 네트워크들도 같은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허브가 있고 그 허브에 많은 관계의 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약에 고속도로 같은 모양이라면 한 지점이 막혀도 쉽게 우회할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브 공항에 사고라도 나면 항공 교통은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곰곰이 따져보면 <펄프픽션> 을 네트워크로 그렸을 때, 허브에 해당하는 사람은 두목 마르셀러스이다. 그만 제거하면 <펄프픽션> 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쉽게 예방할 수 있었으리라. 실제로도 ‘네트워크 과학’은 허브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방식을 찾아내는 방법으로 널리 응용되고 있다.

주일우(과학평론가ㆍ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네트워크 이론'

'네트워크 이론'은 사회 네트워크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복잡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6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머리 겔만이 명쾌하게 설명했듯이 복잡계는 그 특징이 구성요소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히 설명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관계나 연결에 대한 이해가 복잡계를 설명하는데 관건이 된다. 현재 '네트워크 과학'은 인터넷, 월드와이드웹을 비롯한 정보통신 네트워크, 세포 내 물질간의 상호 반응을 나타내는 신진대사 네트워크, 각 기업 간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경제 네트워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활발한 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네트워크 과학의 개척자 중 한명인 정하웅의 연구에 따르면 각종 생화학 물질 분자들을 네트워크의 점으로 찍고 그들이 참여하는 생화학 반응을 선으로 삼아 연결하면 항공망과 유사한 네트워크를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는 분자들이 허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응용하면 중요한 분자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낼 수 있고 질병을 치료할 때, 어떤 분자를 통제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밝힐 수 있다.

경제 네트워크도 항공망과 비슷한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IMF 경제위기와 같은 연쇄 부도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허브가 되는 중앙은행에 자금을 넉넉히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 최근에는 주식의 동향을 네트워크 과학을 응용해서 풀어보려는 노력도 활발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식시장에서도 허브가 되는 주식이 있어서 주가의 요동 현상을 주도한다고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