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알아서 기기'가 국민체조처럼 보편화된 세상이다. 예전의 '기기'가 강제적, 억압적 권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기기'였다면(그래서 기면서도 속으론 빠득빠득 이를 가는 형국이었다면), 요즈음의 '기기'는 기면서도 헤벌쭉 웃는, 내면과 외면의 합치된 '기기'이다. 더 나빠졌다는 소리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여러 신문들을 통해 저명하신 교수님들의 시론이나 칼럼을 읽게 된다. 그 시론이나 칼럼을 읽고 난 후, 바로 옆 사설을 읽게 되면, 거기에 좀 전에 읽었던 칼럼과 놀랍도록 닮은 글 한편이 또 다시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 논설위원이고, 누가 외부 필자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저명하신 교수님이 투잡을 뛰고 계신 것일까? 신문사에서 그 양반들 의료보험비를 대신 내주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흡사한 글들을 좋아라 하면서, 지면 아까운 줄 모르고, 이중삼중으로 상재하는 신문사들이다.
그러면서 꼭 이런 말을 덧붙인다.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에라이, 차라리 말을 말지. 그럴 땐 이렇게 덧붙여주는 것이 맞지 않나. '우린 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알아서 긴 겁니다. 그래도 귀엽긴 귀엽네요'라고.
소설가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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