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고려대 총장이 표절 문제로 말썽이 계속되자, 전체 교수에게 신임을 물을 작정이라고 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 보전을 하자니 그렇고, 이제 와서 물러나자니 표절은 없었다는 주장이 머쓱해질 것 같다.
논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 난처하게 된 그를 보면서, 옛 사람들이 출처(出處)에 서릿발처럼 엄격했던 자세가 떠오른다. 여기서 '출'이란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고, '처'란 벼슬 하지 아니하고 재야에 있을 때 그 몸을 깨끗하게 하면서 후학을 가르쳐 훗날의 필요에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
■ 조선 시대에 출처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인물은 역시 남명 조식이 아닐까 싶다. 그는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지만 한번도 벼슬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이런 불응이 오히려 명성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헐뜯는 소리도 많았지만, 그는 시세가 나아갈 만한 때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산림에 은거함으로써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여 벼슬 자리에 연연하는 소인배들에게 경계가 되었다. 그러면서 곽재우 정인홍 등 수십 명의 우뚝한 인물을 임진왜란 때 맹활약하는 의병장으로 길러냈다.
■수제자인 정인홍은 "고금의 인물을 두루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업적의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했다. 우연찮게 한두 가지 공적이 있다고 해도, 평소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세가 마땅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선비는 구차하게 나아가서도 안 되고 구차하게 물러나서도 안 된다. 나아가면 늘 이익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고, 물러나 있을 때는 세상 일을 잊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 장자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장자가 양나라 재상 혜자를 만나러 가게 됐다. 혜자는 버럭 경계심이 들었다. 장자가 재상 자리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장자는 말했다. "남방에 원추(봉황의 일종)라는 새가 삽니다. 그 새를 아시는지요? 원추는 남해에서 한번 날면 북해까지 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올빼미가 썩은 쥐를 갖고 있다가, 원추가 날아오자 제 먹이를 빼앗길까 봐 깩 하며 놀랐다네요. 지금 선생은 양나라 때문에 저를 보고 그리 놀란 것입니까?" 썩은 쥐를 부여안은 올빼미 꼴이라면 지식인다운 출처는 아니겠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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