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청관재 컬렉션 민중미술전(19일까지)을 보았다. 한 미술 애호가 부부의 소장품 100여 점으로 구성한 전시다.
민중미술 이야기가 나오면, 여전히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논쟁한다. 하지만 “청관재 컬렉션을 봤더니 촌스럽고, 조야하다. 작업량도 얼마 되지 않는데 민중미술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따져 묻는 이들을 만나면 가슴이 갑갑하다. 화가 나서 “모르면 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민중미술은 민중문화예술운동의 차원에서 봐야 진면목을 드러낸다. 또 민중문화예술운동의 핵심은 일부 젊은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혁명적인 분위기에 있다.
1970년대 말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은 민족문학 논쟁이었다. 이어 갑자기 탈춤, 풍물패, 마당극 따위가 등장하더니 민주주의의 가치를 종교적으로 신봉하는 저항문화운동의 형태로 발전했다. 민족미술이라고도 부른 민중미술은 그러한 새로운 문화적 폭발이 만든 새로운 지형에서 싹텄다.
새로운 의식에 공감한 일군의 작가들이 실경 산수, 풍속화, 탱화, 민화, 부적 등에서 가치를 찾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다. 탱화, 민화, 부적의 재해석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기에 좋았고, 진경 산수나 풍속화의 현대적 해석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기에 좋았다. 그런데 종종 작가들이 구속됐고, 작품들은 압수되거나 파손되기 일쑤였다. 독재 정권의 탄압과 냉전의 논리는 민중미술의 작품에 위험한 매력을 더했다. 금지된 책을 읽고 금지된 그림을 보고 금지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신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민중미술의 양식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목판화 형식은 중국과 일본의 유사한 선배들에 비교했을 때 독창적인 점이 다소 부족하고, 유화 작업들은 일부는 초현실주의의 차용이고, 일부는 신구상주의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가로 내세울 대표적인 다작의 민중미술가가 없다는 것이 민중미술의 가장 뼈아픈 약점”이라는 평가도 들린다. 그래도 종교적 도상의 형태를 빈 집회용 이동 회화인 걸개그림은 전례가 없는 독창적 형식이고,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연작은 특이한 양식의 역사화로서 미술사적 가치를 주장할 만하다.
힘에 넘치던 민중미술이 쓰러진 것은 90년대에 들어 한국의 민주주의가 크게 성장하면서 전처럼 직설적인 메시지를 그림에 담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88년께 주체 미학을 수입해 집단창작을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논리를 빌어 당파적 미술을 주장하는 평론가들이 등장하면서 민중미술은 신선함을 잃기 시작했다.
청관재 컬렉션에서도 90년대에 제작된 맥없는 풍경화들은 시대에 부적응한 늙고 지친 투사의 정신적 공황감을 드러내, 보는 이를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부패한 권력을 비판하고 우상을 파괴해온 민중미술이라는 힘센 거인이 넘어진 자리에서 최정화와 이불로 대표되는 새로운 한국식 현대미술이 괴이한 모양으로 자라났으니, 민중미술의 종결은 그 시작만큼이나 의미 있는 사건이다.
민중미술의 정신은 새로운 세대로 이어져 90년대의 새로운 당대적 시각예술을 낳았다. 많은 문화 연구자들이 90년대 중반을 “1930년대 식민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획득했던 현대성의 수준을 되찾은 중요한 시점”이라고 평가한다. 당대성의 획득에 민중미술이 어떻게 디딤돌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차분히 사료들을 정리하고 연구자들의 학술논문을 기대할 시간인 것이다.
임근준ㆍ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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