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ㆍ128쪽ㆍ6,000원
나는 더디고 햇살은 빨랐으므로 몇 해째나 가을은 나보다 먼저 저물었다 / 땅거미를 덮으며 어둠이 쌓이고 사람들은 돌아가 불을 켜서 내걸 무렵 나는 늦게 닿아서 두리번거리다 깜깜해졌던, / 그렇게 깜깜해진 여러 해 뒤이므로 / 저문 길에 잠깐 젖던 가는 빗발과 젖은 흙을 베고 눕던 지푸라기 몇 낱과 가지 끝에서 빛나던 고추색 놀빛과 들녘 끝으로 끌려가던 물소리까지,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 모여 있겠는가 / 그것들 아니고 무엇이 하늘의 푸른빛을 차고 깊게 했겠는가 / 하늘 아래로 걸어가는 길이 참 조용하다 / 사람의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더디게 오래 걸어서 이제야 닿는구나 목소리를 낮추어 혼잣말하듯이, (‘혼잣말’ 전문)
시 앞에서 시인의 나이를 들먹이는 것은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만성(晩成)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대기(大器)의 이력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 실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을 듯하다.
위선환 시인의 신작 <새떼를 베끼다> 는 그가 예순 여섯 나이로 내는 세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1960년대부터 시를 썼지만 오랫동안 시단을 떠나 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 귀가 순해지는 나이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를 냈다. 나무들이> 새떼를>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청아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시인은,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에서 주로 시의 소재를 찾고 있다. 시집 표제처럼 새들을 베끼고, 돌멩이와 나무, 바다와 강물을 베껴내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模寫)만 하지 않는다. 자연물을 꿰뚫어, 그 적막과 고요 이면에서 끊임없이 명멸하는 생명의 숨결을 온몸으로 소화시켜 담백한 시어로 토해낸다. 따스한 시선으로 대상을 어루만져 체득한 삶의 지혜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 와중에도 시인은 그 간 수천 수만의 시인들이 제각각 감정을 이입했을 이 평범한 소재들을 그저 평범한 형식 안에만 묶어두지 않는다. “제,발,바,닥,으,로,는,한,걸,음,도,내,딛,지,못,했,다.” 열 일곱 글자와 열 여섯 쉼표, 하나의 마침표로 이루어진 간결한 시(‘발자국’)에서는 특수한 파격에 보편의 철학을 담고 있다. 또 ‘이슬 방울이 떨어지는 법’에서는 시선의 수직 이동에 따라 순차적으로 생성되는 시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기법이 독특하다.
비록 ‘겨울’과 ‘고독’의 이미지가 시 전반을 관통하고 있지만, 그가 혼자 대면하는 겨울은 황량하거나 무기력하지 않다. 오히려 이조차도,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에서처럼, 차가움 속에서 혼자만의 성찰로써 더 또렷하게 구현되는 정신의 힘을 도드라지게 한다. 기나긴 회의와 고심 끝에 가다듬어진 노련한 시작(詩作)은 메시지 전달 효과를 극대화하는 완숙한 기교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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