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징(明澄)한 수면 위로 파도 소리가 맴돈다.
격한 진동의 욕망을 거울처럼 정(靜)한 수면 아래 꾹꾹 누르고 있는 호수, 석호(潟湖). 수천 수만 년 오랜 시간 파도가 쳐 밀어올린 모래는 둑이 되고 담장이 된다. 그 모랫둑이 바다를 둥그러니 감싸 안아 만든 호수. 바다가 스스로를 격리시킨, 파도가 사라진 바다, 석호다.
이른 새벽 강원 고성땅의 송지호를 찾았다. 이정표 없는 농로를 비집고 들어가 호수를 만났다.
겨울 호수의 아침은 말갛게 깨어났다. 하늘로 번져 오른 여명은 호숫물에 그대로 붉은 물빛을 풀어낸다. 그 붉은 수면 위로 구름이 수를 놓고, 갈대가 제 모습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호수의 반듯한 평면 안에 세상의 아침이 녹아 들어있다.
이따금씩 호수 저편의 길을 지나는 차량 소리만이 정적을 깨울 뿐, 호수의 새벽은 차분했다. 이제 해가 뜰 때가 됐는지 붉은 기운이 잦아든 하늘이 완연히 밝아왔다. 파문도 일지 않는 정적의 호수 위로 멀리서 ‘쿵, 쿵’ 언 땅을 울리는 일단의 발자국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 강산 위에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이라네~” 아침 구보 나온 장병들이 불러대는 힘찬 군가다. 농로를 따라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장병들. 오랜만에 듣는 군가가 정겹다. 곧 이어 붉은 햇덩이가 솟아 올랐고, 은은한 호수 위로 강렬한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동해안에 석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호수는 화진포 송지호 영랑호 청초호 광포호 매호 향호 경포 등 8개. 상당수 석호들이 개발과 오염에 밀려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중 화진포와 송지호가 석호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호수다. 화진포는 그나마 관광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송지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둘레 4km, 20만 평의 면적으로 그리 큰 편도 아니다.
송지호 옆 7번 국도변에는 철새 관망대가 솟아있다. 송지호는 한반도 해안선을 이정표 삼아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던 겨울 철새가 머물다 가는 철새도래지다.
석호는 갯터짐을 통해 민물과 짠물이 만난다. 장마철 민물의 유입이 늘어나 호수의 수면이 크게 오르면 호수와 바다를 경계 짓던 갯둑이 터지면서 짠 바닷물이 호수로 섞여 들어온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니 송지호에는 도미 숭어 황어 잉어 전어 가물치 뱀장어 등이 함께 산다. 송지호에는 맑은 물을 상징하는 재첩도 산다. 매년 8월초면 송지호에선 재첩잡이 체험축제가 열린다.
짠물이 섞여 겨울에도 잘 얼지 않고, 잡아먹을 물고기도 지천이니 철새에겐 이보다 좋은 쉼터도 없을 것이다. 겨울이면 청둥오리 기러기떼와 천연기념물인 고니가 호수로 날아든다.
고성=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최북단의 바닷가, 고성 '여기가 바로 금강이라네'
한반도가 휴전선으로 나뉘었듯, 강원 고성도 분단의 땅이다. 절반은 남한에 절반은 북한에 속해있다. 고성의 중심은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산 금강산이다.
금강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들을 수놓고 바다를 수놓았다. 화진포가 있고 금구도 백도 등 아기자기한 섬들로 아름다운 고성의 바다는 금강의 기운이 차고 넘친, 금강의 바다다.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이건만 국내 최북단의 이 곳은 군사보호구역의 철조망이 어색해서인지 언제나 호젓하다. 해서 겨울 바다의 사색을 제대로 만끽하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도 없다.
광활한 호수와 바다 화진포
화진포는 바다도 넓고 호수도 넓다.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화진포 호수는 그 면적이 72만평. 호수와 바다가 뿜어대는 경승은 지금보다도 일제 때가 더 유명했다.
당시 외국인의 별장촌이 지어졌고 해방 후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이곳에 생겨났다. 남아있는 이들 별장 건물들은 하나같이 그 위세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지만, 그곳에서 보이는 경관만큼은 최고다. 특히 바닷가 언덕 위 솔숲에 지어진 김일성 별장의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화진포 백사장은 바다의 장쾌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란 걸 여실히 보여준다. 눈을 살짝 왼쪽으로 돌리면 희미한 윤곽의 금강산 자락을 배경으로 반쯤 얼어붙은 호수가 날선 겨울 빛을 튕겨내고 있다.
화진포 백사장은 눈부시도록 희다. 파도가 훑고 지날 때면 ‘사르르~’ 맑은 소리를 낸다. <택리지> 를 쓴 조선시대 문인 이중환은 이를 ‘우는 모래, 명사(鳴砂)’라 했고, 여기서 명사십리란 말이 나왔다. 백사장 바로 앞의 금구도라는 잘 생긴 섬이 있어 화진포의 바다는 허전하지 않다. 택리지>
아늑한 겨울 포구
거진항, 가진항, 아야진항 등 고성의 포구들. 예전 같으면 이맘때 어선 가득 싣고 온 명태로 떠들썩했을 곳이다. 그 흔하던 명태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제는 매년 반복되는 명태축제장에서도 수입 명태로 근근히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바닷가 가득 메웠던 명태 덕장은 사라졌지만 고성의 포구에는 아직까지 원초적 활력이 샘솟고 있다. 거진항 같은 큰 항구도 좋지만 아야진이나 가진항 등 작은 포구는 그 운치가 남다르다. 아야진은 양쪽에 바닷가 누정인 청간정과 청학정을 끼고 있다. 갯바위에 둘러싸인 가진항은 크지 않지만 아늑함 만큼은 그 어느 포구에 뒤지지 않는다. 속초나 강릉, 고성 등지의 회맛을 아는 현지인들이 100% 자연산을 믿고 찾아드는 포구다. 겨울 햇살을 받으며 그물 작업을 하는 어부들의 손길에서 삶의 진지한 체취를 맡을 수 있다.
거진항에서 거진등대를 끼고 화진포로 돌아가는 길과, 화진포에서 해양박물관을 끼고 초도리를 지나 대진항으로 가는 해안도로는 고성 바다의 숨은 절경이다. 차창에 들이치는 파도를 맞으며 바다를 스치며 달리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송지호의 왕곡마을
송지호 뒤편에는 왕곡마을이 있다. 기왓집과 초가집이 섞여 있는 전통마을이다. 현재 전신주 지하화 공사가 진행중이라 마을은 어수선하다. 이 마을이 생긴 것은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등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지금은 모두 50여호가 산다.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한 특유의 북방식 주택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우물이 없다. 마을이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매년 10월 민속체험 축제가 열린다.
고성=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대조영 세트장 오픈, 고구려 시대로 타임머신 탄 듯
설악산 자락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설악한화리조트내에 지난해 11월에 개장한 ‘설악 씨네라마’가 주인공.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 의 세트장이다. 대조영>
2만7,000여 평 부지에 고구려와 당나라 시대를 보여주는 건축물 120여 동이 건립됐다. 18m 높이의 당나라황궁, 중국의 4대정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쑤저우의 졸정원을 모델로 한 측천무후후원, 당나라 전통주거지인 사합원,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성곽 등을 볼 수 있다.
설악워터피아 바로 앞에 조성된 ‘설악씨네라마’의 입구에서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가 맨 먼저 손님을 맞는다. 매표를 하고 들어서면 75m 길이의 고구려성곽이 위용을 드러낸다. 성곽 뒤편 설악산의 기묘한 산세와 절묘한 조화를 보인다.
세트장은 그저 건물들만 덩그러니 놓여진 공간이 아니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돼 있다. 고구려관아 지역에서는 외줄타기 체험과 풍물놀이 한마당이 진행되고 있고, 한화리조트의 대표상품인 PO(Program Organizer)들이 고구려인의 복장을 하고 손님들의 관람에 흥을 돋운다. ‘설악씨네라마’에서는 앞으로 고구려 군사들의 무예시범, 성문파수병의 교대의식, 궁중행렬, 궁중혼례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질 계획이다.
‘설악씨네라마’에서의 드라마 촬영은 이달 중순부터 본격화할 예정이다. 관람시간 오전9시~오후6시. 입장료 대인 6,000원, 소인 4,800원. (033)632-8711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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