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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프리가 만난 사람 - 2년째 투병생활… 최초 댄스가수 이금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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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프리가 만난 사람 - 2년째 투병생활… 최초 댄스가수 이금희씨

입력
2007.02.08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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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미스터 김은~, 싱겁게 키는 크지만, 그래도 미스터 김은 마음씨 그만이에요….’

1960년대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댄스가요 <키다리 미스터 김> 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는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67)씨. 허스키한 보컬에 화끈한 율동으로 당시 남성들의 혼을 빼놓았던 정열의 화신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미스 다이너마이트’였을까.

그런 그가 2년 전부터 뇌출혈로 인한 합병증으로 쓰러져 사경을 넘나들며 힘겹게 투병 중이다. 외동딸 민윤정씨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서울 은평구 연세노블병원(302호실)으로 달려갔다.

병실은 노인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건강미 넘치던 몸은 이미 사라졌고 이씨는 앙상한 몸매의 백발노인이 되어 있었다. 폐와 신장 기능의 저하로 호스를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주입 받으며 힘없이 누워있었다. 세상에! 저 분이 정열적인 율동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수 이금희씨란 말인가!

핏기가 사라진 그녀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네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만 본다. “어머니는 반갑고 좋으시면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세요. 오래전부터 음식을 못 드시고 말씀도 못하십니다.”딸 윤정씨의 설명이다.

미8군 가수로 출발해 외국의 유행음악을 대중에게 전파한 1세대 여성 팝 메신저였던 그는 부동자세로 노래하던 당시의 정적인 가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온 여걸이었다.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을 만큼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런 그가 노래는커녕 말조차 못하게 되었다니.

사실 그는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작곡가 오현명에게 개인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던 순수음악도였다. 경남여고 3학년 때 부친의 위암 수술로 가세가 기울어 성악가의 꿈을 포기했다.

마음을 달랠 겸 몰래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의‘그랜드 쇼’구경을 갔다. 그때 현인, 남인수 등 당대 스타가수들의 노래에 매료돼 대중가수로 인생궤도를 수정했다. 가족 몰래 보따리를 싸들고 오빠 친구였던 가수 송민도를 무작정 따라나서서 엉겁결에 가수로 데뷔했다. 그때가 1959년. 이후 1963년, 미8군‘뉴스타 쇼’에 출연하면서 8군 쇼의 주력 가수로 성장했다.

당시 161cm의 적지 않은 키에 50kg대의 터질 듯한 몸매로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했던 이씨는 뭇 남성들의 야릇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의 차례가 오면 객석은 일순간 후끈 달아오르며 끊이지 않는 앙코르 세례가 터져 나왔다. ‘이금희가 부르면 바로 히트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966년, 기획자 황우루와의 만남은 그녀의 음악인생에서 전환점이라 할만큼 중요하다. 팝송이 아닌 가요곡‘키다리 미스터 김’을 처음 취입하면서 계층을 초월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 최초로 팬클럽을 보유했던 가수는 오빠부대의 원조로 불리는 남진이나 ‘영원한 오빠’ 조용필이 아니다. 바로 이금희씨다. 제작자 황우루는 ‘키다리 미스터 김’의 홍보를 위해 당시로서는 드물게 신장 180cm가 넘는 30여 명의 키다리들을 모아 이금희 팬클럽을 결성해 화제가 됐었다. 이후 이금희는 영화는 물론 TV 드라마에서도 재능을 뽐냈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절정의 인기와는 달리 여자로서 이금희씨의 인생은 고통스러웠다. 1965년 결혼 후 두 번이나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심한 충격을 받았던 그는 세 번째 임신을 한 1969년, MBC TV 개국 쇼 출연을 마지막으로 가요계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인기보다는 자식을 낳고 싶었다. 이때 태어난 외동 딸 윤정씨를 위해 인기가수의 길을 미련 없이 버리고 평범한 어머니의 길을 택하면서 대중과 멀어져갔다.

결국 77년 이혼한 이금희씨는 이후 극성 엄마로 살아왔다. 외동딸을 위해 반평생을 헌신했기에 모녀는‘친자매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씨는 1987년 공식적으로 컴백해 교회성가대활동과 성가집 발표 등을 하며 음악생활을 이어갔다.

건강이 악화된 것은 2004년 오른쪽 무릎에 인공 관절 수술을 하면서부터. 수술 부작용으로 혈압이 올라가 갑자기 쓰러졌다. 3개월마다 병원을 옮겨 다녔지만 2006년 1월 심한 욕창과 패혈증으로 절대 절명의 순간을 수 차례 넘겼다.

“그때 의사선생님이 2개월을 넘기지 못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지금 이 병원으로 온 것도 치료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손을 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고통이 심할 때마다 천국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신앙심이 강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소중한 딸을 혼자 남겨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냐”며 쉽게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엄마의 끼와 재능을 이어받은 윤정씨는 대학에서 대중음악을 전공하며 가수의 꿈을 키운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한사코 딸의 가수데뷔를 반대했다.

“왜 그때 어머니가 절 말렸는지 이젠 알 것 같아요. 어머니가 인기 있던 시절엔 찾으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교회 분들 밖에는 없습니다. 연예인의 세계는 서로 사랑해줄 줄 모르는 세계라 생각하신 것 같아요.”섭섭함이 베어있는 말이었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온 윤정씨는 “엄마 치료를 위해 결혼자금으로 모아 둔 돈도 다 떨어졌습니다. 결혼은 상관없지만 치료비를 위해 내놓은 한남동 집이 팔리지 않아 걱정”이라며 “절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낍니다. 가수의 꿈은 버렸지만 앞으론 어머님의 소원인 CCM 복음가수로 살아갈 생각”이라고 눈물을 보였다.

화끈한 율동의 댄스곡들로 대중에게 흥겨운 기운을 선사했던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그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으로 이어지는 후배 댄스가수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했던 한국 대중가요의 큰 별이다. 이제 그를 볼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명절을 앞둔 그의 병상이 더욱 쓸쓸해 보인다.

글.사진=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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