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인 1997년 11월말. 각 언론사의 경제담당 기자들은 한국금융연구원장의 행적을 좆느라 연구원과 서울시내 호텔을 분주히 오갔다.
그가 만난 사람, 그가 움직인 사진 하나라도 신문에 실릴라치면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부장에게 큰 호통을 들어야 했다. 금융연구원은 당시만해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정부 연구기관이었다. 이런 기관의 원장에게 언론의 이목이 쏠렸던 것은 그가 만나는 사람 한명한명이 당시로서는 기로에 선 한국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울대 초빙교수로 국제통상금융센터 책임을 맡고있는 박영철(67) 전 고려대 교수. “그해 11월 초, 미국에서 열린 학회에서 일본의 대장성 차관인 사카키바라를 만났다. 한국의 금융시장에 대해 묻길래 ‘경제의 기초변수들이 튼튼하다’며 ‘일본이 한국의 유동성을 지원을 해준다면 위기를 넘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한국은 IMF로 가야 할 것 같다’며 ‘미국정부와도 상의를 마쳤다’고 했다. 이후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한 1개월여 동안 한국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사카키바라 차관과 IMF의 스탠리 피셔 수석부총재, 그리고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이 우리나라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오랫동안 연구를 같이하면서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는데 아무리 한국 경제의 건전성을 주장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시 금융연구원장을 맡고있던 박 교수는 “이때만큼 비애감을 느낀 적인 없다”며 “우리 경제가 또 다시 이런 위기를 맞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_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 밖에 없었는지요.
“사카키바라를 만났던 그 학회에서 두통의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머스 부장관과 피셔 부총재였는데 하나같이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데 한국경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었지요. 그들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면서 ‘이대로 가면 한국정부가 파산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알아보니 상환해야 할 외채는 밀려오고 국제 금융 시장에서 더 이상 기채도 할 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셔 부총재에게 200억, 300억 달러의 유동성만 조달할 수 있으면 외환위기는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위기를 넘기려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한국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보따리를 내놨습니다. 힘도 없고 어쩔 수 없었지요.”
_한국을 어려움에 빠뜨리려는 국제적인 음모론 시각도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방어할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당시 우리 기업, 특히 재벌들이 세계 각국에서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였고 대우가 동유럽 등지에서 GM을 속속 이긴 것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정부와 금융기관은 ‘자기들에게서 빌려간 돈으로 한국기업들이 세계적인 확대경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더구나 한보가 망하자 이런 한국 재벌의 투자행태에 위험성이 큰 것으로 보고 기회만 되면 자금을 회수하려 한 것이지요. 그 해 9월말 홍콩에서 있었던 IMF 세계 은행 연차총회에서 국제 금융기관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감지가 됐었습니다. 참여한 수많은 국제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한국경제의 전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빌려준 돈을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지급보증을 할 수 있느냐’고 묻기만 했어요. IMF는 또 금융지원을 하면서 재벌개혁을 강력히 요청해 한국의 재벌식 경영행태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려 했습니다. 당시 한국경제의 엔진이었던 재벌에 대해 기업의 투명성이나 지배구조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음모론이 제기될 수 있겠으나 일방적으로 음모라고 몰아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_재벌개혁에 대한 요구는 내부적으로도 많지 않았습니까.
“당시 개혁의 기본 기조는 워싱턴 컨센서스(미국이 주도하는 영미식 시장경제)였어요. 시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자유화와 개방화를 진행하라는 것이 골자인데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여러가지 제도적인 개혁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은 마지못해 하는 개혁이란 성격도 없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아직도 영미식 시장경제 체제가 전통이나 문화 관습측면에서 잘 맞지 않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봅니다. 지금도 한편에서는 개방을 주장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반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계획한 개혁이 제대로 시작되지 않은 상황에서 98년에 경제가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자 개혁의 당위성과 의지가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IMF 졸업을 선언하고 이후 지금까지 개혁과 개堧?놓고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는 겁니다.”
_또 다른 개방,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은 어떻게 보십니까.
“논란이 없을 수 없지만 진전을 시켜야지요. 다섯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해 봅시다. 우선 경제 사회적인 이득이 얼마인지를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으나 한국경제에 분명 득이라고 봅니다. 미국과 FTA를 먼저 하고 있는 캐나다와 멕시코 경제학자들을 여럿 만나 봤는데 그 효과를 계량화 하기는 힘들어도 전체적으로 플러스 요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간 개방과 협력 분위기입니다. 지금 중국 관변 경제학자들을 만나보면 ‘한국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줄 터이니 중국과 우선 FTA를 하자’고 합니다. 한국이 일본과 먼저 FTA를 진행할까 봐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 중국입니다. 우리나라는 언젠가 중국과 일본 모두 FTA를 진행할 터인데 이 때 미국과의 협상경험이 많은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거대 시장이고 중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보는 겁니다. 또 하나는 최근 들어 미국시장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미국시장에서 성공해야 세계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과 미국시장에서의 일류 상품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경제학자가 할 얘기는 아니겠으나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군사적인 면에서 경제적 협력으로 바뀌는 추세라는 사실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봐야 합니다. 더구나 일정 부분에서 초래될 불가피한 피해를 자체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마찰을 결국 돈으로 해결해야 할텐데 우리 경제가 이를 감당할 만한 수준에 있다는 판단입니다.”
_ 지금 우리 경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합니다. 앞으로 1,2년은 더 4%이상 성장을 할 것으로 봅니다. 문제는 지난 10년간 계속 성장 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줄어들고 투자는 10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술이라도 진보돼서 생산성이 늘어야 하는데 이것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2,3년후에 어떻게 4-5% 성장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수출이 버텨주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달러화가 폭락하면 가장 타격을 받는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수출이 안되고 국내 수요도 없고 기술진보도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부도 모르지 않을 테지만 성장 잠재력 확충에는 힘을 모으지 않고 있습니다.”
_지금이라도 남은 기간 방향을 잘 잡아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 정권에서 하려고 하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책이란 국민이 이해하고 따라가야 하는데 부동산 정책처럼 국민이 완전히 무시하는 상황에서는 무엇하나 되는 게 없어요. 정책은 좋든 나쁘든 국민이 따를 때 효력을 갖습니다. 정부가 무엇을 하던 팔짱을 낀 채 딴 곳을 보고 있으니 어떤 정책이 통하겠습니까. 요즘은 신문에 글을 써도 읽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현상중 하나가 바로 무엇인가 개선하려는 논의는 없고 서로 의견대립만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왜 그래. 조용히 살지’하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다행히 기업이 정치에 크게 휘둘리지는 않을 정도로 자율성과 개방을 많이 확보해 경제의 기본적인 흐름이 크게 나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또 이렇게 1년을 허비할 생각을 하니 더없이 안타깝지요. 지금의 갈등을 좋은 경험으로 삼아 제2의 위기는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박영철 교수는
국내 경제학계에서 손꼽히는 화폐금융 분야 권위자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정부 정책에 깊이 관여한 경제학자로 1987년 전두환 정부시절에는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1992년부터는 초대 한국금융연구원장을 지냈고 이후 신경제계획위원장, 금융발전 심의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경제수석을 마친 뒤 미국 하버드대 교환교수로 있었고 귀국해서는 고대 교수로 복직해 2005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토론을 즐기고 논리전개가 명쾌한 칼럼니스트로도 유명하다. 박교수는 한국일보와 많은 인연을 맺고 있는데 85년에는 '일요일 아침에' 고정 칼럼니스트였다. 그해 9월8일자 '경제정책이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돼'라는 제목의 칼럼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한 화두다. 92년에는 '2000년대를 개척하자, 대 전환기 한국의 선택'이란 본보 연중 캠페인의 발제자로 활동했고 98년과 99년에는 한국논단 필진이었다.
그는 요즘 서울대 국제통상금융센터에 매일같이 출근해 한국의 미래에 관한 리포트를 진두지휘 중이다. 후배 경제학자 1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이 리포트는 외환위기 10년을 돌아보고 다음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찾아내 보자는 취지의 연구이다. 그는 "8월께 최종 완결될 이 리포트를 한국의 미래를 위한 종합보고서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1939년 충북 보은생
서울대 경제과, 미국 미네소타대 경제학박사
1969 국제 통화기금 조사관
1972 고려대교수
1986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1987 청와대 경제수석
1992 금융연구원장 (~1998)
1993 신경제 계획위원회 위원장
1997 금융발전심의위원장
1998 상업-한일은행 합병 추진위원장
1999 외환은행 이사회 의장
2001 외교통상부 국제 경제 및 무역대사
2003 국민경제자문위원회
2004 공적자금 관리 위원장
2005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및 국제통상금융센터 소장
이종재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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