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과 당진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안오지였다. 공장은 물론 변변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민들은 바다와 갯벌에만 코를 박고 살아갈 뿐 아무런 비전도 희망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완전히 바뀌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제철소와 석유화학단지, 자동차 관련공장이 줄줄이 생기고 고층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섰다. 오지가 산업단지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대산유화단지 연매출 9조원
1990년대 초 들어선 대산유화단지는 서산의 간판이다. 연간 매출액은 9조원에 이르고 근로자수는 3,000명이 넘는다. 이 일대에는 대산단지 외에도 6개의 산업단지가 가동 중이며 또 2곳이 추가로 조성되고 있다.
“바다 건너편이 中시장 ” 갯벌뿐이던 서산·당진유화·제철공장 들어서며 산업단지로 탈바꿈 서해안‘오토 밸리’선 울산·부산 車생산량 넘어서
3일 대산유화단지 내 삼성석유화학 수출전용부두. 대형 크레인이 5,000톤급 화물선에 폴리에스테르의 원료인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을 쉴 새 없이 선적하고 있다. PTA는 40시간의 뱃길을 달려 중국 상하이(上海)항에 도착, 화섬업체로 운송돼 섬유로 변신한다. 이 공장이 생산하는 연간 70만톤의 PTA 중 내수용 17만톤을 뺀 53만톤이 전량 중국으로 수출된다. 이 회사 모상옥 대리는 “서해 너머 중국은 우리에겐 내수시장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대산단지 5.3㎞ 앞 바다의 해상계류시설(SPM)에 정박해 있는 30만톤급 유조선에서 중동산 원유 200만배럴이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현대오일뱅크 저유탱크로 빨려 들어온다. 8개의 저유탱크는 1개가 장충체육관보다 크고, 거미줄 같은 파이프라인은 서울~부산(425㎞) 거리의 3배보다 긴 1,300㎞에 달한다. 공장 생산지원팀 김기문 과장은 “여기서 정제된 벙커C유 등은 다시 파이프라인을 통해 선박에 실려 수출되고, 그 중 60%의 목적지는 중국”이라고 말했다.
당진은 국내 제2의 철강도시
대산유화단지에서 국도38호선을 타고 당진쪽으로 25㎞ 가량 달리면 웅장한 현대제철 당진공장이 눈에 들어온다. 10년 전 한보철강 부도 이후 폐허처럼 방치됐던 공장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시뻘건 쇳물이 흐르고, 굉음을 내며 거대한 두루마리 화장지 모양의 열연강판(핫코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2004년 한보철강을 인수한 현대제철은 지난해 10월 당진공장 옆 135만평에 포스코에 이어 국내 두번째 일관제철소를 착공했다. 1단계로 2011년까지 5조2,400억원을 들여 연산 700만톤 규모를 갖춘 뒤 2단계로 2015년까지 2조2,600억원을 투자, 1,200만톤 규모로 확충할 계획이다. 사업이 완료되면 연간 17조원의 생산유발효과와 15만명의 고용창출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일관제철소는 고철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전기로와 달리 거대한 고로(용광로)를 갖추고 철광석에서 쇳물을 녹여내는 방식이다.
당진에는 현대제철 외에도 휴스틸, 동부제강, 유니온스틸 등이 자리잡고 있어 전형적인 철강벨트로 부상하고 있다.
또 다른 산업축 오토밸리
서해안의 또 다른 산업축은 자동차다. 충남 아산의 현대자동차, 경기 화성 기아자동차, 평택 쌍용자동차, 전북 군산 GM대우대동차가 부품업체들과 더불어 ‘오토(AUTO)밸리’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은 철강 및 석유화학제품의 대표적인 수요처이기 때문에 상호 연계성과 시너지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를 증명하듯 서해안 벨트의 연간 생산량(230만대)은 자동차단지의 대명사격이던 울산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벨트 생산능력(180만대)를 이미 넘어섰다.
서해안에 대한 투자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에쓰오일은 2010년까지 3조6,000억원을 투자, 대산에 2010년까지 75만평 규모의 제2정유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에쓰오일은 “대산공장은 중국시장을 겨냥한 ‘지상유전(地上油田)’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국제강도 올해 7,600억원을 들여 당진군 20만평에 연 150만톤 생산규모의 후판(선박제조용) 공장을 착공할 예정이다.
지역경제 눈부신 성장
산업 성장은 지역살림도 확 바꿔놓았다. 당진군은 한보철강 부도 이후 5년 연속 급감했던 인구가 현대제철 가동과 더불어 증가세로 반전, 시 승격을 앞두고 있다. 지방세 수입도 10년 전 437억원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1,400억원으로 3배 이상 급증했다. 당진읍에서 일식집을 하는 김유철(46)씨는 “손님도 부쩍 늘고 돈도 많이 도는 것이 느껴진다”며 “당진에서는 강아지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해안 산업벨트가 헤쳐나가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연안에 산업단지가 속속 들어서다 보니 곳곳에서 환경파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과다한 산업용지 공급으로 인한 난개발 우려도 나오고 있다. 고부가가치를 위한 산업의 고도화도 요구된다.
산업연구원 김영수 지역산업팀장은 “대규모 산업단지 형성 만으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는 없다”고 지적하고 “기업혁신을 뒷받침할 연구개발기능과 산학협력체계 등이 동반되어야 하며, 전후방 연관관계를 갖는 고기술 부품소재산업과 함께 클러스터를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남대 강병수 교수는 “중국의 상하이(上海), 칭다오(靑島), 톈진(天津), 다롄(大蓮) 등 황해 연안 개발전략에 부응해 서해안을 대중국 산업전진기지로 육성하되 서산 석유화학, 당진 철강, 군산 자동차 등 지역특화전략으로 자치단체들과 기업의 무분별한 중복투자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산ㆍ당진=전성우 기자 swchun@hk.co.kr
■ 조규선 서산시장 “대산항 개항… 기업 유치 탄력받을 것”
“과거가 미국, 일본과의 교역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 시대였다면 미래는 중국과 한반도가 마주하고 있는 황해의 시대입니다. 그 미래의 중심에는 서산이 있습니다.”
조규선 서산시장은 “서산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1차 산업과 2ㆍ3차 산업의 비율이 6대 4였지만 지금은 4대 6으로, 조만간 3대 7로 급속히 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 시장은 “한ㆍ중 교역규모는 연평균 25.1%라는 놀라운 성장속도를 바탕으로 지난해 1,000억 달러를 넘었다”며 “중국 수출을 겨냥하는 기업들이 서해의 관문인 서산을 선호하고 있고, 최근 대산항 개항으로 기업유치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산시는 대산읍을 중심으로 석유ㆍ정밀화학 및 물류기업을 배치하고, 지곡ㆍ성연면에 자동차 조립 및 부품업체를 집적화하는 특화전략을 펴고 있다.
조 시장은 “서산시가 지난해 말 산업정책연구원이 실시한 미래경쟁력 평가에서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10위를 차지했다”면서 “이는 충청권에서는 가장 높은 성적으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화를 선도하고 있지만 조 시장은 환경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그는 “기업들이 몰려오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주민들을 위해 좋을 일”이라며 “그러나 기업을 얻고 환경을 잃는 우는 절대 범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 최대의 철새도래지인 천수만 서산B지구에 관광휴양 및 교육연구기능, 농업생명산업단지를 갖춘 웰빙바이오특구 조성을 추진하는 것도 산업과 인간, 환경이 조화를 이룬 도시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전성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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