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경기 부천시 소사본2동 세종병원에 위성중계차가 떴다. 서울의 대형종합병원도 아니고, 지방 중소병원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날 세종병원 진료과장인 황흥곤 박사의 관상동맥 질환 시술장면은 위성을 통해 미국, 일본 등 전세계 5,000여명의 의료진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됐다.
이후 그의 새로운 시술법은 심장내과 및 흉부외과 전문의의 극찬을 받으며 ‘황의 테크닉’으로 명명됐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이 ‘황의 법칙’(해마다 메모리용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메모리신성장론)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처럼, 심장ㆍ혈관 부문에서 또 한 명의 황 박사가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셈이다. 병원 관계자는 “지방 중소 규모 병원의 시술 과정이 전 세계로 위성 중계된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세종병원은 심장ㆍ혈관 분야에선 이미 명성을 갖고 있다. 1982년 설립 이후 연 평균 수술 건수 1,300건, 2004년에는 국내 최단기간 심장수술 2만 차례 돌파 등의 기록을 세웠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국내 유일의 심장ㆍ혈관 전문병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종병원은 늘 ‘세계’를 생각하고 있다. 1999년 16개국 77명의 석학들과 교수들을 초청, 심장해부학 국제세미나를 개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당시 국제세미나에서 세종병원 의료진은 1984년부터 사망 환자의 가족들을 설득해 얻어낸 심장을 부검함으로써, 진단-수술-처치에 이르는 전 과정을 면밀하게 살핀 뒤 개선할 점 등을 적은 책을 펴내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내 의료진 뿐 아니라 해외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대병원 서울중앙병원 삼성서울병원 이대부속병원 순천향대병원 상계백병원의 의료진이 세종병원에서 수탁교육을 받은 데 이어 중국 옌볜의대 하얼빈의대, 선양시홍십자의원, 몽골의 사스틴센트럴병원 의료진도 연수를 다녀갔을 정도이다.
세종병원이 이처럼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는 것은, 병원도 기업이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 최고의 의료서비스 제공을 통해 중국 동남아 등 해외 환자들을 유치하고, 또 해외로 치료 받으러 나가는 국내 환자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함으로써 심장진료 및 수술에 관한 한 세계적 병원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의료기관에서 치료비로 지출한 돈은 연간 1억 달러에 달한다. ‘암 치료는 미국의 ○○병원’식으로 여유 있는 계층을 해외진료가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병원이 탄생한다면,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해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불편함을 더는 것은 물론 천문학적 규모의 국부유출을 막고 외화획득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료업계 관계자는 “이젠 병원이 서울에 있는가 지방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며 “최고의 의료서비스만 제공된다면 지방소재 병원이라도 국내환자는 물론 다른 나라 환자까지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세종병원은 현재 심장ㆍ혈관 전문병원으로 25년 동안 한 우물만 팜으로써 비(非)서울지역의 입지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적 병원으로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국내 유수의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 뿐 아니라, 미국 일본의 심장전문병원들도 이젠 세종병원의 경쟁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각 부서간 유기적 협진시스템과 24시간 심장 전문의 진료 체제를 구축한 것도 다른 병원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세종병원만의 강점이다. 세종병원에선 환자에 대한 검사 후 진단부서와 치료부서의 모든 전문의가 모여 최종 진단을 도출한다.
또 심장내과와 흉부외과 의사가 함께 24시간 365일 병원 내에 상주함으로써 최단시간 응급대처가 가능하다.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에선 진단부서와 치료부서의 벽이 높아 화급을 다투는 중환자실에서조차 협진을 하려면 수차례의 진료의뢰서가 필요하다.
노영무 세종의학연구소장은 “이젠 병원도 기업들처럼 전세계를 상대로 경쟁해야 하는 시대”라며 “특히 중소 병원의 경우 전문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밝혔다.
부천=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의료산업 세계화 앞장 박영관 이사장 인터뷰
“치료비 대비 의학기술 수준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병원들도 이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박영관(68) 세종병원 이사장은 “한국 의료 산업의 세계화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생을 심장병 진단ㆍ치료와 함께 해온 의사인 동시에 병원 경영자다. 그는 “1977년 의료보험이 실시된 뒤 우리나라 의사들은 어느 나라보다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게 됐다”며 “환자들은 큰 불편을 겪어야 했지만 역설적으로 환자들에 대한 다양한 경험은 우리나라 의사들의 실력을 크게 향상시켰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개업의의 경우 하루에 100명 이상의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니, 하루 진료환자가 많아야 20~30명 정도인 외국 의사들이 100년 이상 걸려 터득한 노하우를 20~30년만에 정복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박 이사장은 이어 낮은 의료수가 정책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온 우리 병원들의 치료비는 외국 병원들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고 강조했다. 관상동맥 우회로 조성술의 경우 미국에선 치료비가 5,000만원에 달하지만 우리나라에선 800만원이면 충분하다. 이는 일본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이러한 사실을 적극 홍보할 경우 전세계의 환자들을 한국으로 유치할 수 있다는 게 박 이사장의 판단이다. 이미 태국에선 저렴한 치료비를 내 세워 의료서비스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 이사장에게는 세계시장 개척이 또 하나의 블루오션 전략이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박 이사장은 1982년 연간 8,000명의 선천성 심장병 신생아가 태어나는 데도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자는 400명에 불과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한양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의료혜택 사각지대였던 부천에 병원을 세웠다.
자금은 해외경제협력기금(OECF)으로 조달했다. 모두가 말렸지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간 셈이다. 박 이사장은 이에 대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의 경우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자칫 시기를 놓치면 평생 불치병으로 고생해야 하는 게 가슴 아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병원을 경영하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 9,000여명을 후원단체들과 함께 수술을 해줬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돈이 없어 심장병을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사라지자 이젠 해외로 눈을 돌린 것. 이미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 심장병 어린이 300여명을 수술했다.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심장재단, 여의도순복음교회 등이 치료비의 절반 가량을, 박 이사장이 나머지에 대한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장은 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을 다니며 공부한다. 6일 의료 비즈니스의 새 장을 열고 국경을 초월한 의료봉사를 실천한 공로로 서울대 경영대 최고경영자과정(AMP) 총동창회로부터 이구택 포스코 회장, 심갑보 삼익THK 부회장과 함께 AMP 대상까지 받는 박 이사장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며, 스트레스 안 받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부천=박일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