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11개월 앞둔 요즘, 최대 화두는 여론조사다.
잠시 70년 전을 돌아본다. 1936년, 미국 대선 직전. 한 월간지는 237만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뒤 공화당 랜던 후보의 당선을 점쳤다. 조사 대상은 전화번호부, 자동차등록부에 올려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청년 조지 갤럽은 자동차등록부에서 빠져 있는 하층민들까지 고루 포함시켜 수천명을 상대로 조사를 했다. 갤럽은 민주당 루스벨트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다. 선거 결과는 갤럽의 완승이었다.
여론조사 표본추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여론조사가 제대로 실시된다면 민심을 비쳐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론조사는 현실 정치에 메가톤급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후보 교체론까지 제기된다. 여풍(女風)을 일으키며 프랑스 사회당 대통령후보가 된 루아얄 의원의 지지율이 요즘 떨어지자 당내 일각에선 후보를 바꾸자는 주장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도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 추락으로 '선수 교체론'에 시달렸다.
2002년 3월, 한 방송사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승부를 갈랐다. 광주지역 경선 며칠 전에 실시된 가상 대결 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1% 포인트 차로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자 대의원들의 표심은 이인제 후보에서 노 후보로 급속히 바뀌었다.
지난 대선 때 노무현ㆍ정몽준 후보 간의 단일화 과정에서는 여론조사가 예비선거 역할까지 했다. 얼마 전 고건 전 총리가 불출마 를 선언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지지율 하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쯤 되면 여론조사는 '빅브라더'(big brotherㆍ大兄)같은 위력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론조사 결과가 신문ㆍ방송 등에 보도될 경우 민심에 미치는 파장은 더욱 크다. 정책 논쟁이 활발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주자에게 지지가 더욱 쏠리게 되는 밴드웨건 효과(bandwagon effect)가 증폭된다.
여론조사가 과학적으로 실시되고, 공정하게 보도돼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거법에는 여론조사 지침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선거법 108조에는 조사 방식의 공개 등에 대해서만 간략히 규정돼 있다.
그 밖에는 '한국마케팅여론조사협회'(KOSOMAR)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윤리강령이 있을 뿐이다. 여론조사기관이 100여 곳이 넘지만 KOSOMAR에 가입한 기관은 35곳 정도에 불과하다. 언론사와 공동 조사를 하는 조사기관 가운데도 KOSOMAR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회사들도 있다.
여론조사가 과학이 되려면 우선 조사자의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 지난 대선 때 특정 대선주자와 가까운 사람들이 여론조사기관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중립 훼손' 가능성을 우려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아가 여론조사 기관은 유권자 마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 몇 가지 요건을 지켜야 한다. 정확성이 떨어지는 전화자동응답장치(ARS) 조사 결과는 가급적 언론에 보도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또 많은 표본이 정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차를 줄이기 위해 최소 1,000명 가량의 표본 수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여론조사를 민심의 거울로 만들기 위해 여론조사 가이드라인을 꼼꼼히 마련할 때가 됐다.
김광덕 정치부 차장대우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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